도피와 회귀
나는 내 권리를 포기할 수 없어.
“선생께서는 북한 국가안전보위부에 끌려갔을 때… 누군가로부터 사적인 부탁을 받고 물건을 가져온 사실이 있지요? 보위부 밀실에서 대남요원과 단독면담을 가질 때 말입니다. 그걸 물어 보지 않고 그냥 돌아갔더군요.”
199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수상작 『비어 있는 방』으로 등단한 작가 최인의 장편소설이다. 그는 『문명 그 화려한 역설』로 1억고료 국제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다.
소설은 1월 1일에 시작해 12월 25일로 끝맺는다. 일기체 형식을 따른다. 날짜 하나하나에 국내외적 사건과 철학적 개념을 인용 제시해 ‘도피와 회귀’가 역사 속에 어떻게 적용되었는가를 보여준다.
8월 21일
본질 없는 현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1978년 8월 21일 미국 및 서구 물리학자들은 반물질을 저장하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반물질은 물질이 거울에 비친 영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반물질의 존재는 1955년 반양자가 발견됨으로써 확인되었다. 반양자는 우주의 모든 물질에 존재하는 소립자인 양자와 똑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으나, 양자가 +전하인 데 반해 반양자는 -전하이다. 이에 대해 CERN은 양자와 반양자가 똑같은 수명을 가진다고 내세우는 핵물리학자의 기본원리는, 우주가 물질과 반물질의 반반씩으로 구성되지 않고 물질이 반물질보다 더 많이 차지한다는 사실과 모순된다고 지적했다.
현상에 대한 인식과 판단은 다음과 같다. 즉 내가 있는 대로 있고, 있었던 대로 있고, 있을 대로 있을 것이라고 가정해 보자. 이때에 나의 시각과 촉각과 지각일반이 아무런 결함이 없다고 상상해 보자. 그리하여 나의 통각과정, 나의 개념적 사상, 나의 표상과 사고체험, 나의 체험 일반에 결함이 없어서 그 모두를 특정한 배열과 결함 속에서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이때, 무엇이 이런 것들 이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방해할까. 나는 나의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들을 인정한다. 이것은 어떤 보증에 근거한 생각일까. 단순한 외부지각의 보증에 의해서일까. 나의 통각과정에 의해서일까. (본문중에서)
『도피와 회귀』는 인류의 생존과 번영이 도피와 회귀의 법칙으로 진행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선과 악, 생과 사, 이념과 제도, 문명과 역사까지도 도피와 회귀의 법칙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이 집단에서 도피해 자유롭게 되었지만, 다시 집단을 그리워해 회귀하고자 하는 의지를 <자유로부터의 도피>라고 피력했다. 아놀드 토인비는 문명이 도전과 응전의 연속 과정으로 탄생했으며, 도전과 응전이 인류를 진화시키고 과학과 문화를 발전시켰다고 <역사의 연구>에서 주장했다.
이와 같이 생성과 소멸, 전진과 후퇴, 진보와 퇴보, 건설과 파괴는 도피와 회귀를 바탕으로 역사를 만들고 문명을 꽃피웠다.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전쟁과 이념의 대립, 종교적 갈등, 문명의 충돌 또한 이 법칙 아래서 발생하고 봉합되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사용한 변증법의 논증과, 헤겔이 현상학적 인식론에 적용한 정립(테제)- 반정립(안티테제)- 종합(진테제)도 도피와 회귀의 틀 안에서 구현되었다. 이와 같이 도피와 회귀의 법칙은 학문과 역사, 종교, 이데올로기를 견인하며 인류를 성장시켰다.
주인공 명하(철학교수)는 남북분단과 좌우 이데올로기의 충돌로 인해 파멸의 길을 걷는다. 남과 북 그 어디에서도 살 수 없는 명하는 결국 제3국으로의 도피를 결심한다. 명하의 도피는 이념적 도피가 아니라, 삶 그 자체로부터의 도피다. 남한당국은 주인공이 북으로 망명할 것을 우려해 방해공작을 펼친다. 남한당국의 시선으로 보면 주인공의 망명은 체제에 대한 불복일 뿐.
도피와 회귀라는 법칙은 명하의 삶을 날카롭게 재단하며 그 존재를 드러낸다.
명하의 선택은 어디를 향하게 될까. 이 책을 펼친 독자들은 명하의 뒤를 쫓으며 깊은 철학적 사색을 해나가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책 소개 따위에 도피를 간추린다는 게 말이 안 된다. 담을 수가 없다. 그냥 읽어야 할 책이다.
『도피와 회귀』는 작가 최인이 2005년 3월에 집필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났다. 그동안 최인은 도피와 회귀를 108번이나 수정했다. 그 숫자를 정확히 짚어낼 정도로 도피와 회귀에 대한 그의 애정은 남달랐다. 집필 시작 시점은 오래 전이지만 소설이 가리키는 것은 우리의 ‘오늘’이다. 주인공 최명하의 발자취를 따라 걷다 보면, 우리 내면에 잠재되어있는 ‘떠나고 싶은 욕구’와 ‘다시 돌아가고 싶은 욕구’를 발견하게 된다. 소설 속에 그려진 1년은 거대한 역사의 축적이며, 최명하의 삶은 도피와 회귀의 굴레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도 같다. 역사는 반복되며, 우리는 우리가 존재하기 전의 과거까지 돌아봐야 한다는 걸 소설은 알려준다.
『도피와 회귀』는 이 시대를 돌아보고, 가름하고, 통섭(統攝)하는 소설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할 범국민 교양서이자 인문학적 소양을 쌓을 수 있는 철학소설이다. 일반인, 대학교수, 정치인, 종교인, 언론인, 예술가, 공무원, 회사원, 노동자, 학생 모두는 이 책을 읽음으로써 미래를 전망하고 통찰할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지금 우리는 도피와 회귀, 그 어느 것도 선택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바로 도피와 회귀가 세상에 나온 이유이다.
p10
그는 새해 아침, 무위로부터 자신을 탈출시켜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이불을 쓰고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p11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세상으로부터 완벽하게 괴리된 고독감을 느꼈다. 그것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독감이고 근원을 알 수 없는 무력감이었다. 그는 자신의 내부에서 솟구치는 무력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하루 종일 책을 읽기도 하고, 밤새워 술을 마시기도 하고, 머리가 아프도록 고민도 해 보았다. 하지만 가슴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무력감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p22
죽음이란 어려운 것도,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죽음이란 언제든지, 누구에든지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다. 또한 죽음은 너무나 순간적이어서 인간의 힘으로는 막을 도리조차 없다. 그런데 자기 자신의 감정조차 통제치 못하는 인간이 어떻게 그것을 막겠는가.
p51
철학은 이 시점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p73
인간의 앞모습은 악하나 인간의 뒷모습은 선하다. 그에 반해 동물은 앞뒤에 관계없이 언제나 선하다. 왜냐하면 동물들은 항상 등을 하늘로 향한 채 살아가기 때문이다. 오로지 인간만이 170㎝라는 몸을 일으켜 세우고, 신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잘못은 바로 그와 같은 시각적 자세와 생각의 차이에서 존재한다. 인간이 170㎝의 직립으로 일어서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그 순간. 바로 그 순간부터 인간은 타락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p79
“저는 십오분실에서 북한 관련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북한 관련 업무라니요?”
“대공 쪽 업무 말입니다.”
그는 석축 위에 서 있는 남자들을 불안한 시선으로 올려다보았다. 대공업무를 본다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찾아와 명함을 내미는가. 그가 간첩이나 그 비슷한 행위를 한다고 의심하는 것은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그와 경희의 관계를 알고 찾아왔다는 말인가.
p79
“선생께서는 북한 국가안전보위부에 끌려갔을 때… 누군가로부터 사적인 부탁을 받고 물건을 가져온 사실이 있지요? 보위부 밀실에서 대남요원과 단독면담을 가질 때 말입니다. 그걸 물어 보지 않고 그냥 돌아갔더군요.”
“내가 보위부 밀실에서 사적인 부탁을 받고 물건을 가져왔다고요?”
“우리가 알기에는… 선생께선 중요한 직책에 있는 인물을 만나 비밀스런 부탁받고 물건을 반입해 왔습니다. 틀림없이 말입니다.”
그는 밤색양복의 시선을 피해 먼 산으로 눈길을 던졌다. 이들은 모든 사실을 파악해 놓고 질문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p81
그는 밭고랑에 쪼그리고 앉아서 솟아오른 잡풀을 뽑았다. 그들은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들의 진지한 표정과 위협적인 말투가 그걸 말해 주었다. 그는 길게 자란 잡초를 뽑아 던지며 마음을 다졌다. 어떠한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그 일만큼은 절대로 발설하지 않겠다고.
p98
인간들은 높은 곳을 갈망할 때 당연한 것처럼 위를 올려다본다.
p99
오늘의 슬픔으로부터 아주 먼 곳으로 도피하라.
p292
“이제 절망은 끝이야.”
그는 큰 소리로 중얼거리고 미친 사람처럼 히죽히죽 웃었다. 절망이 곧 죽을병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죽음에 이를 수는 있어도 죽을 수는 없다. 절망은 정신적인 병이며, 부정적 자아가 만들어 낸 어둠의 병이다. 자아의 병에는 세 가지 경우가 존재한다. 첫 번째는 인간의 정신이 절망 속에서 자아를 갖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두 번째는 절망하고 또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지 않는 경우이다. 마지막은 너무나 절망하여 오히려 자기 자신이고자 원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는 이제야 비로소 절망에서 벗어난 온전한 자아를 느꼈다. 그것은 분명 확고한 자아의 인식이고 자아의 확인이었다. 그동안 그는 자아를 잃은 채 제삼자에 의해 유도되고 제지되며 살아왔다. 그 자신은 타자에 의해서 만들어져 왔으며 타인에 의해서 끌려왔다. 그게 바로 지금까지 그가 느낀 자아의 모습이고 자아의 형태였다.
“나는 엄연히 나야.”
그는 푸른 하늘을 향해 소리치고 풀밭 위에 드러누웠다.
p296
그가 아무리 힘들더라도 한 자루의 엽총은 그를 위로하는 존재였다.
“오연발 브라우닝…”
그는 갖고 싶었던 장난감을 얻은 아이처럼 큰 소리로 웃었다. 진정으로 그는 인간의 목숨을 빼앗는 기계를 손에 넣고 싶었다. 비록 그것이 인간의 목숨을 위협하는 물건이지만, 한편으로는 생명을 보호해 주는 병기였다. 인간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생명을 건 전쟁도 불사한다. 그런데 자신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대상이 눈앞에 존재함에랴. 그는 승용차 시동을 걸고 액셀러레이터를 힘차게 밟았다.
“나는 내 권리를 포기할 수 없어.
p301
나는 나의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들을 인정한다. 이것은 어떤 보증에 근거한 생각일까. 단순한 외부지각의 보증에 의해서일까. 나의 통각과정에 의해서일까.
p301
나의 시선은 물질적 환경이 가장 먼 항성의 세계까지 파악한다. 아마 이 모두는 꿈이고 착각이고 상상일지 모른다. 이러저러한 판단은 주어진 것이고, 진정한 의미에서 유일하게 부여된 것이다. 지각에는 초월성의 이러한 수행을 위한 명증성이 갖추어졌는가. 우리의 인식은 초월적 대상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명증성이라는 것은 특정한 심리적 성격 외에 다른 무엇인가. 지각과 명증성의 성격, 그것은 말하자면 주어진 개념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복합체에, 왜 어떤 것이 상응하여야만 하는가는 수수께끼이다.
p302
현상 속에는 언제나 본질이 내재해 있고, 내재적 본질 없는 외부적 현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p308
인간이 현상에 호도되는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현상은 아름답지만 본질은 결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어서다.
p314
인간들은 모든 것을 삼킬 듯한 격류를 보고 무서워하며 굴복한다. 저항이 준비되지 않은 곳에
서 그 힘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것이 운명의 정작용이다. 저지할 만한 장애물이 없으면 더욱 그 맹위를 떨치게 되는 게 운명의 파괴적인 힘이다. 그는 자신 앞에 놓인 운명의 끈을 잡아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그런 다음 운명의 힘을 자신의 것으로 되돌려 놓아야겠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지금 세상의 그 어느 곳에서도 발을 붙일 수 없는 존재가 자신 아닌가.
p319
그는 공장지대를 관통하는 도로를 걸어가면서 생각해 보았다. 자신은 지금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것인가. 자신이 하는 행위는 과연 옳은 것인가. 이렇게 돌아다니면 취직할 회사를 찾아낼 수 있는가. 그는 영세 공장들을 바라보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슈퍼 여자의 말대로 요즘은 막일을 할 자리도 만만치 않았다. 모든 공장들이 생산을 중단하거나 문을 닫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는 일자리 찾는 행위를 멈출 수가 없었다. 그것은 화니가 임신을 한 상태였고, 압박해 오는 당국에 대항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했다. 그는 손수건을 포켓에 찔러 넣고 아스팔트길을 걸어갔다.
p328
그는 사람과의 공통감, 조직과의 소통감, 우주와의 일체감까지 상실해 버렸다. 그의 천국은 사라지고 외로운 세계와 마주 서게 되었으며, 막막한 곳에 던져진 이방인이 되었다.
p351
“내가 강의 자리를 알아봐 줄까?”
“그만두십시오.”
“인문학 강의에 염증을 느껴서 그래?”
“그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인문학은 나를 죽이지 않는데, 체제가 나를 죽이거든요.”
“체제가 자네를 죽이다니?”
“그런 일이 있습니다.
p356
“이건 비밀스런 야긴데, 오경희 씨가 조만간 사람을 하나 보낸답네다. 중요한 닐을 처리하기 위해서 말입네다.”
“중요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
“그렇습네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고요?”
“구체덕인 건 잘 모르디만, 아마 닐본 쪽에서 여자 분이 한명 건너올 것 같습네다.”
“일본에서요?”
“아무튼 그렇게 알고 계시라요.”
p375
역사는 언제나 개인과 집단 위에서, 그들의 피를 먹고 앞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
p383
그는 그 순간 자신 앞에 도래한 우연으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 앞에 나타난 또 하나의 무언 속으로 과감히 뛰어들 것인가. 아니면 진정성을 담보로 한 우연으로부터 도망칠 것인가. 그것은 쉽게 받아들일 수도 없고, 쉽사리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 우연이 어떤 것을 가지고 왔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p452
“선생님은 그게 문제예요. 조금만 헤어져 있어도 죽을 것처럼 말하는 거 말이에요.”
“헤어지는 건 언제나 슬픈 거니까.”
“그래도 부정적인 말은 싫어요.”
“알았어. 잘 다녀올게. 사랑해.”
제목 도피와 회귀
지은이 최인
분류 장편소설
발행처 도서출판 글여울
발행일 2021년 9월 17일
페이지 460p
가격 1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