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
작품세계
전후 프랑스 문학에 있어 최대의 존재는 사르트르지만 어떤 의미에서 현대인에게 사르트르보다도 카뮈가 더욱 호소력이 있어 보이는 것은 그의 성실성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카뮈에게 ‘신(神)없는 성인(聖人)’ 또는 ‘현대의 증인’이라는 명예로운 칭호가 부여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카뮈가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타계하기까지 업적을 다시 한 번 살핀다는 것은 곧 우리들 자신의 고민과 희망과 위대성을 재확인하는 것이 될 터이다.
카뮈는 빈곤과 병고를 철저히 체험한 소년 시절부터 끊임없이 죽음의 관념에 위협당하며 생과 사, 자신의 세계와의 모순, 대립에 괴로워했다. 자연 속에 묻혀 있을 때에도 도취와 불안을 깨닫고, 사회에 있어서는 절망을 느끼면서도 종교에 의지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의 행복을 추구하는 숙명적인 부조리의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자기의 사색과정으로부터 인간은 생과 사의 모순사이에서 살도록 운명지어졌다고 생각하여 죽음이 있음으로써 삶에 가치가 있고 삶은 사랑스러운 것이라고 논했다. 삶에의 절망이 없이는 삶에의 희망도 없다. ‘부조리의 철학’은 이러한 인식에 바탕하여, 인간은 싸우고 반항하면서 살아야 함을 가르치는 사상이다. 커다란 바위를 이를 향해 끝없이 밀어올리는 시지프스, 모든 것을 거부하고 사형대에 오르는《이방인》의 뫼르소는 카뮈가 창조한 이 부조리의 인간 전형, 바로 그것이다.
그후 카뮈의 부조리의 사색은 전쟁, 점령, 수용소, 저항 운동 등 극한상황 속에서 보고 들은 것과 체험에 의해서 더욱 다듬어진다. 그 이후 그는 폭력과 부정을 제거하고, 인간을 비참한 경지에 빠뜨리며, 인간성을 빼앗고, 인간의 존엄을 더럽히는 등의 사태에 의연히 맞서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가「콩바」지의 파리 주재 기자로 있으면서 갈리마르 출판사의 교정위원으로 입사하고「콩바」지의 지하 발행을 꾀하는 한편《독일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비밀 간행한 것을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한편 그 동안에도 작품은 쉬지 않고 발표되었다. 1944년에 발표된 희곡《오해》는 고향의 암담한 잿빛 생활을 피하여 남쪽의 밝은 빛을 미치도록 동경하는 여인 마르타의 범죄를 그린 것으로 그리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1945년에 제라드 필라프가 주연을 맡아서 공연한《칼리귤라》가 대성공을 거둠으로써 희곡작가로서의 재능도 인정받게 되었다.《칼리귤라》는 숙명에 반항하여, 사회의 관례와 도덕에 역행하여 절대적인 자유를 추구하다 자멸하는 폭군의 비극을 다룬 작품이다.
1947년에 이르러서는 장편《페스트》가 발표되었는데, 이 작품은《이방인》이상으로 카뮈의 명성을 높였다. 이 작품이 간행된 며칠 후에 ‘비평가 상’이 수여되었을 때 이 때문에 이 상도 유명해질 것이라고 사람들이 말했을 정도로《페스트》에 대한 사람들의 열광은 대단했다. 이 작품에 이르러서는 사회악에 도전하는 그의 적극적인 태도가 강하게 표출되어 있다. 부조리의 체험과 인식의 차원을 넘어서 인간을 절멸시키는 악과의 투쟁을 우의(寓意)적으로 다루었다. 카뮈는 전쟁 반대, 사형 반대의 입장에 섰으며, 특히 전쟁에 의한 인간의 대량학살이나 사상범의 극형에 적극 반대했다.
이 소설에서는 이제까지와 같은 인간의 부조리에 대한 개인적인 저항이 아니라 집단적인 반항이 그려져 있다. 페스트균에 의해 한 도시가 봉쇄되어 유언비어가 나돌고 암시장이 번창하는 상태는 바로 전시의 파리이고, 선의의 사람들이 괴질과 싸우다 쓰러져가는 광경은 전시의 저항운동이나 혁명기의 내란을 연상시킨다. 따라서 이 소설의 우의(寓意)는 장소나 시간을 초월하여 각국의 유사한 사건에 적용되고, 여기에 그려진 동지적 연대감과 희생적 정신에 의한 행동은 숱한 독자의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카뮈는 이 작품의 성공으로 전후세대의 정신적 지주로서 부각되었다.
계속해서 발표된《계엄령》은 같은 주제를 극화한 희곡이며, 평론《반항적 인간》은 근대의 니힐리즘의 비판이며, 그것에 대한 반항을 논한 작품이다. 카뮈가 주장하는 반항은 결코 혁명적인 행동이 아니라 차라리 점진적인 개혁을 지향하여, 극좌(極左)와 극우(極右)의 절대주의에 굴하지 않고 항시 폭력을 부정하며 중용을 터득한 수단을 사용하는 끈질긴 저항이다. 무신론자인 그는, 신을 절대시함으로써 인간다운 자유와 희망이 사라지게 되는 것을 싫어하지만 마찬가지로 역사를 절대시하는 마르크스주의, 스스로를 절대시하는 사상적, 예술적 니힐리즘에도 반대한다. 혁명가는 결국 권력을 동경하여 압제자가 되지만, 반항적 인간은 정의를 바라고 인간성을 존중하며 미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그 근본적인 사고방식이다.
즉 그에 있어서는 내일의 정의를 위해서 오늘의 부정이 이루어지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희곡《정의의 사람들》 가운데의 테러리스트는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혁명가들과는 달리 폭군을 암살하는 경우에도 죄없는 사람이 말려들 위험이 있으면 그 행동을 단념한다. 여기서 그와 같은 반항적 태도는 자기기만이며 소극적인 것이라는 장송의 비난을 계기로 사르트르와의 사이에 사상적, 정치적인 논쟁이 벌어져 10년 가까이 계속된 두 사람의 우정은 깨어지고 말았다. 격렬한 논쟁을 치르고 나서 카뮈는 몇 편의 번안극을 발표했을 뿐 문학, 정치면에서 몇 해 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인간의 비참에 대항하는 운동에는 적극 참여하여 1954년에는 7명의 튀니지아 인 사형수 구호운동에 서명하고, 1953년의 동베를린 폭동, 1956년 10월의 부다페스트 봉기 때에도 공식적인 태도를 표명해 보였다. 그러나 카뮈에게 있어서 가장 괴로운 시련은 그 후에 일어난 알제리의 프랑스에 대한 독립 전쟁이었다. ‘그것은 나에게는 개인적인 불행이다’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을 보아서도 그의 고통은 가히 짐작이 간다.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알제리의 독립 전쟁 때는 가능한 한 정치적 발언을 삼갔다. 모두가 그의 ‘반항적 인간’으로서의 사고방식의 소산이다. 알제리 문제에 대한 1939년에서 1958년까지의 카뮈의 태도는《시사론집》 제3권에 수록되어 있다.
4년 동안의 침묵을 깨고 1956년에는 ‘반항적 인간’의 논리를 거꾸로 써서 그린 풍자소설《전락》을 발표했다. 이어서 1957년에는 단편집《추방과 왕국》을 발표했다. 이 밖에도 카뮈는 많은 소설, 희곡, 수필집을 발표하고 사르트르와 더불어 실존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다. 1957년 10월 17일 카뮈의 전작품에 대하여 노벨 문학상 수상이 결정되었다. 이 때 카뮈의 나이는 44세였고 역대 노벨 문학상 수상자 중 최연소자였다. 같은 해 12월 10일 수상식 석상에서 행한 연설에서 카뮈는 ‘나로서는 내 예술 없이는 살 수가 없다. 그것이 나에게 필요한 것은, 그와는 반대로 그것이 나를 어느 누구와도 갈라놓지 않고 있는 그대로 모든 사람들과 똑같은 수준에서 내가 살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라는 태도를 밝혔다.
카뮈는 새로운 장편소설《최초의 인간》의 구상을 마치고 집필을 시작했을 때, 프로방스 지방의 루르마랭에 있는 소유지에서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다가 불의의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그의 친구 미셀 갈리마르가 운전하던 차가 파리 동남방 몽트로의 빌르블레뱅 근처 르 그랑 프로사르에서 플라타너스를 들이받았다. 이 때 카뮈의 웃옷주머니에는 파리 행 비행기표가 들어 있었다.
부조리와 반항의 사상
카뮈의 소설들은 모두 현실과 비현실, 실제와 가상 사이에, 혹은 그 두 가지에 걸쳐서 구성되어 있는 독특한 경지를 이룬다. 그러므로 그 속에 숨은 상징적인 의미와 배면의 세계를 찾아내는 것이 그를 보다 이해할 수 있는 첩경이 될 것이다. 이러한 카뮈 문학의 사상적 배경은 그의 수필집《시지프스의 신화》나《반항적 인간》에서 볼 수 있는데, 그것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 소위 ‘부조리’와 ‘반항’의 사상이다.
그렇다면 부조리와 반항이 어떤 개념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카뮈는 세계에 있어서의 인간이라는 존재를 모순된 존재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세계에 있어서의 존재라는 것은 한 마디로 인생이다. 다시 말하면 인생을 모순에 찬 것으로 본다. 인생에서의 모순적인 것들이란, 예컨대 ‘죽음에 대한 절망과 삶에 대한 기쁨’, ‘고독과 사랑’, ‘선과 악’, ‘암흑과 광명’, ‘절망과 건강’, ‘겨울과 여름’, ‘바다와 감옥’……등이다. 이 같은 용어를 카뮈는 작품의 제목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작품 속에서도 무수히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카뮈에 의하면 이성을 가진 존재인 인간에게는 합리의 욕망이 있는 까닭에 모순된 세계의 뜻을 알아내고자 한다. 그런데 세계에서는 인간의 이성으로서 알아볼 수 있을 만한 아무런 뜻도 없다. 카뮈는《시지프스의 신화》에서 그것을 고백한다. ‘나는 이 세계가 그것을 조절하는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어떤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그 의미를 알지 못하면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는 사실이다. 나의 조건 밖에 있는 의미가 나에게 무슨 뜻이 있단 말인가? 나는 인간의 용어로서밖에 이해할 수가 없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른바 합리의 욕망과 세계의 몰이해라는 두 개의 상반된 것, 그러한 이율배반으로부터 생기는 모순, 그것이 바로 카뮈의 부조리이며 인간의 피치 못할 숙명인 ‘인간조건’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나가 언제나 느끼는 것은 아니다.
흔히 우리는 부조리를 느끼지 못한 채 살고 있다. 의식이 졸고 있는 것이다. 그저 습관에 의하여 기계적으로 일상 생활의 쳇바퀴를 돌며 인생의 뜻이 있는지 없는지 그러한 것도 문제 삼지 않는다. 그처럼 졸고 있는 의식은 실존자(實存者)의 의식일 수 없으므로 의식이 완전히 깨어나서 부조리를 명확히 의식할 때에야 비로소 인간은 인간다울 수 있다. 그러므로 카뮈에 의하면 부조리의 인식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이기도 한 것이다. 카뮈의 부조리라는 것이 해결할 수 없는 것, 재차 해결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면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인생의 뜻이고 뭐고 다 귀찮고 괴로우니 그저 편히 살면 그만이지 않은가. 그렇지만 그런 경우 의식으로서는 자살이다. 바로 그것이 허망(虛妄)에 직면한 의식을 끌어당기는 또 하나의 유혹이다. 그러나 카뮈는 그렇지만 살아야 한다고 대답한다. 여기에 카뮈 문학의 열쇠가 있다.
‘그렇지만 살아야 한다’는 대답에는 어느 정도의 비약이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생명의 약동이 숨쉬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삶의 긍정이기 때문이다. 부조리와 직면하여 모순을 해소하려 하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삶을 긍정하는 태도, 그것이 다름아닌 카뮈의 이른바 ‘반항’이다. 그러므로 반항은 삶의 의지와 폭발인 동시에 삶의 가능하고 유일한 자세이다.《시지프스의 신화》의 제1장 <부조리의 이론>을 카뮈는 ‘그러나 우리는 살아야 한다’는 말로 끝맺고 있으며 ‘산다는 것은 부조리를 살리는 것이다. 부조리를 살린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카뮈는 부조리의 해결을 꾀하지 않고, 부조리에 반항함으로써 가치를 창조하여 그것을 극복하려 한다. 즉 해결될 희망이 없는 부조리에 반항할 수 있는 힘은 인간의 생명이며, 부조리의 초극을 준비하는 가치를 낳을 수 있는 것도 인간의 생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 속에 고귀한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카뮈는 믿고 있으며, 그것만이 그가 부조리와 대결하는 유일한 무기인 것이다.
이처럼 카뮈는 인간의 세계에 있어서의 존재를 모순적으로 보고 있는데, 그것은 그의 형이상학적 인생관일 뿐만 아니라 그의 윤리관이기도 하다. 집단 속에서 살아야 하는 개개인은 논리적인 면에서도 숙명적으로 모순과 부닥치게 되어 있다. 그 같은 모순에 직면하여, 모순을 이루고 있는 상반되는 진리를 부조리한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인간 속에 있는 고귀한 그 무엇의 힘으로써 극복하려는 그의 반항적 태도는 윤리적 부조리에도 적용되고 있다. 그 고귀한 무엇은 정의(正義)라고 해도 좋고 넓은 의미의 사랑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카뮈는 ‘인간 속에는 경멸받을 것들보다는 더 많은 찬양 받을 것들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지금까지 까뮈의 기본적 태도인 모순의 명철한 인식과 부조리에 대한 올바른 반항을 기본으로 전개되는 그의 사상의 일단면을 살펴보았다. 결국 카뮈는 모순을 이루는 두 기본적인 인식의 어느 한쪽으로도 쏠리지 않은 긴장의 모랄, 그가 ‘정오(正午)의 사상’이라고 부르는 한계의 모랄을 지향했다고 할 수 있다.《이방인》에서는 부조리에《페스트》에서는 반항에 더욱 많은 강조를 두면서 사상의 경과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황량한 페허에서 인간 정신의 위기를 간파하고 그것의 극복을 위해 카뮈가 제시한 ‘부조리’와 ‘반항’의 사상은 중세의 종교 이상으로 힘을 가지고 독자들을 감동시켰고 영향을 끼쳤다. 혼란하고 무질서한 정신적 풍토 위에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하고 확립시킨 그의 문학적 공로 외에도 자기에의 성실과 인간의 존엄성을 기초로 사회 정의를 실현하려는 그의 작가적 정신은 충분히 한 세대의 정신을 대표하고 지배했다는 의미를 영원히 잃지 않을 것이다.
많은 작가들이 개인의 부조리에 대해 정의하고 해석하여 왔으며, 부조리의 중요성에 관한 그들 나름의 생각에 대하여 글을 써왔다. 장 폴 사르트르는 일반적인 종교들이 우리가 신의 존재에 도달하는 것을 막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부조리를 지적하는 키르케고르를 언급하며 부조리를 개인적인 경험의 범주로 인지했다. 카뮈는 부조리주의의 창시자가 아니며 부조리주의 철학자로 계속 여겨지는 것을 후회했다. 카뮈는《시지푸스의 신화》를 출판한 이후 점차 부조리주의에서 관심이 멀어졌다. 연구자들은 카뮈의 사상을 다른 철학자들의 사상과 구별하기 위하여 부조리의 패러독스를 말한다.
카뮈의 부조리에 관한 생각은 1937년 발간된 그의 첫 에세이집《안과 겉》에 나타나 있다. 부조리 테마는 1938년 발간된 그의 두 번째 에세이집《결혼》에 좀 더 세련되게 나타나 있다. 이러한 에세이들에서 카뮈는 부조리에 관한 철학적인 설명을 하거나 정의를 내리고 있지 않고, 대신에 부조리의 경험을 투사하고 있다. 1942년 카뮈는 인간 존재의 삶에 존재하는 부조리에 관한 이야기인《이방인》을 출판했고 이어 동시에 부조리에 관한 문학적 에세이인《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를 내놓았다. 그는 또 부조리 논리를 추구하는 로마 황제 칼리귤라에 관한 연극을 작성했다. 그러나 이 연극은 1945년까지 상영되지 않았다.
1943년 7월에서 1944년 7월까지 익명의 독일인 친구에게 보낸 4개의 편지에서 카뮈는 부조리에 대한 생각의 변화를 드러낸다. 첫 번째 것은 1943년 the Revue Libre에서, 두 번째 것은 1944년 Cahiers de Libération에서, 세 번째 것은 1945년 Libertés신문에서, 출판되었다. 4개의 모든 편지들은《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이름으로 1945년에 작품집《레지스탕스, 반역, 그리고 죽음》에 수록되어 출판되었다. 카뮈는 자신의 에세이에서 독자에게 행복과 슬픔, 어둠과 빛, 삶과 죽음과 같은 이원성에 관하여 발표하고 있다. 그의 목표는 행복이란 무상한 것으로 인간의 상태는 하나의 필멸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분석하는 것이었다. 그는 병적이지 않고 삶과 행복의 위대한 진가를 반영하면서 이 분석을 행하고 있다. 신화(Le Mythe)에서 이 이원성은 페러독스가 된다. 우리는 우리의 삶과 존재가 좀 더 위대해지는 데 가치를 둔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언제가 우리가 죽을 것을, 그리고 극단적으로는 우리의 존재가 무의미해 질 것임을 알고 있다. 우리가 이러한 이원성과 함께 사는 한(나는 나의 불행한 시기를 받아들일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또한 행복한 경험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페러독스와 무관하게 될 것이다.(나는 나의 삶이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동시의 나의 삶은 무가치하다.) 신화에서 카뮈는 우리는 어떻게 부조리를 경험하고 어떻게 부조리와 함께 살아가는지에 관심을 가졌다. 우리의 삶은 여기에 가치를 두는 데 의미를 가져야 한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삶은 의미가 없고 따라서 무가치하다고 받아들이면, 우리는 죽어야 하는가?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그의 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죄인이다. 칼리쿨라는 끝내 자신의 부조리 논리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가 고의로 야기한 암살에 의해서 죽는다. 그러나 카뮈가 아마 칼리쿨라의 부조리적 이성이 틀렸다고 제안하는 할지라도 이 연극의 반 영웅은 작가가 뫼르소의 마지막 대사를 찬양하는 것과 같이 마지막 말을 할 기회를 만든다. 카뮈의 부조리에 대한 이해는 대중의 토론을 고양시켰다. 그의 다양한 제안은 우리를 부조리에 대하여 생각하고 우리 자신이 기여하도록 유혹했다. 협동, 울력, 일치와 같은 개념은 카뮈에 관한 중요한 열쇠이다. 카뮈는 부조리에 관한 우리의 이해에 의미심장한 기여를 했고 확실한 대답으로서의 니힐리즘을 거부했다.
“만약 아무것도 의미를 가진 것이 없다 하더라도, 그것은 옳을 것이다. 그러나 어딘가에 여전히 의미를 가지는 것은 존재한다.” — 독일인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1943년 11월
“이것은 그리고 인간은 무관심, 객관, 때때로의 모호함, 그리고 자연적 질서에 의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는, 그러나 예비되고 불안정한 인간의 행동에 의하여 창조된 부조리적 세계의 신하라는 실존주의가 자주 취하는 관점을 따르고 있다.”
사르트르와 카뮈
현대 지성사에 프랑스의 사르트르와 카뮈는 그들이 갖고 있는 명성과 명예만큼 그들의 자존심과 사상, 사고의 차이로 인해 라이벌을 형성했다. 또한 그들은 투쟁하며 다시 우정을 회복하는 과정을 삶의 한복판에서 행동으로 보여주기도 하고 은밀하게 암시하기도 하고 글이라는 작품을 통해 속내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사르트르와 카뮈는 태생이 달랐기에 생각과 감정, 사고의 유형이 판이하지만 2차 세계대전 속에서 프랑스에 대한 독일 점령기와 해방후 둘이 갈라서야만 했던 이념과 사상의 차이로 마치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또한 둘의 공통점은 문학작품으로 인해 찬사를 받고 노벨문학상이라는 명예를 안았지만 사르트르는 노벨문학상 수락을 거절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카뮈는 (전락)이라는 작품으로 사르트르는 (말)이라는 작품으로 수상의 영예를 안게 된다)
카뮈는 알제리 빈곤층 출생으로 그가 프랑스에서 작가 및 기자로서 활동하던 당시는 알제리는 프랑스령이었고 알제리는 독립을 위한 투쟁과 싸움의 일로를 걷고 있었다. 반면 사르트르는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부모를 일찍 여의고 외조부모 밑에서 자랐던 것으로 보여진다. 성격이 민감하고 자존심, 낭만성이 강한 카뮈와 부르조아적이고 옐리트 기질이 강했던 사르트르는 서로가 잘 맞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1943년 ‘악마와 선한 신’의 리허설에 첫 만남을 시작으로 서로의 입장과 가치를 존중하면서 우정을 쌓아갔다. 두 사람은 독일 점령하에서 레지스탕스로 함께 투쟁하게 된다. 카뮈는 콩바라는 잡지사를 설립하고 사르트르는 현대지를 통해 문학의 세계를 일궈 나간다.
1945년 프랑스가 독일로부터 해방이 되면서 카뮈는 공산당(PCF)으로부터 탈퇴하고 사르트르는 소련 공산당에 호의를 보이며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헐뜯으면서 그들이 쌓아 올린 우정은 금이 간다. 카뮈는 <반항적 인간>에서 자기만의 역사, 부조리를 받아들이고, 그것과 정면으로 맞서면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거부를 담고 있는 더 치밀하고 더 비극적인 기도를 담으며 사르트르의 교조주의적이고 변절된 이념과 사상에 공격의 수위를 높힌다. 즉 사르트르에 대해 역사와 윤리를 저버린 자라고 격렬하게 공격한다. 사르트르는 자신이 심취하고 경도된 마르크스주의 및 소련 식 공산주의를 찬양하고 적극적으로 소련과 컨넥션을 갖게 되며 그가 바라는 혁명 투쟁의 목표는 <유물론과 혁명>,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면서 사르트르는 사회적 책임, 참여, 자유를 부르짖곤 한다. 사르트르가 관여하고 있는 현대지는 작가의 작품활동과 서평, 공산주의를 대변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소련과 헝가리 침공과 함께 소련에 있는 지인들의 무관심과 헝가리 학살을 고발하지 않고 소련의 관료주의를 이끄는 파당에 대한 우정을 더 이상 간직할 수 없다는 것이 사르트르가 공산주의로부터 손을 씻는 원인이 된 거 같다. 반대로 카뮈는 그가 말하는 좌파 지식인이나 실존주의자들이라는 특징을 공유하는 자들과 반대되는 입장을 바탕으로 자신의 개인적, 도덕적, 정치적 ‘자아’를 형성하게 되며 냉전시대의 첫 희생국인 알제리에서 전쟁이 터지면서 카뮈는 모국에서 전쟁이 발생하는 것에 침묵으로 일관한다. 이 침묵이 한 민족을 돕는 길이라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두 사람의 관계가 악화되고 결별의 수순을 밟은 것은 사르트르와 가깝게 지내던 메를로퐁티가 쓴 <요가수행자와 프롤레타리아>를 보면서 메를로퐁티가 모스크바 정치재판을 정당화시켰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대립과 배신을 같은 것으로 여긴다며 분개했으며 역으로 카뮈는 메를로퐁티로부터 반격과 사르트르가 메를로퐁티의 주의 및 견해를 지지했던 점이 커다란 절교 원인으로 보여진다. (1952년)
카뮈는 자신이 살던 지방에서 파리로 향하던 중 불의의 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하고 우정과 투쟁의 긴 역사도 종언을 고하게 된다. 사르트르는 추도사를 읽으면서 카뮈에 대한 좋았던 회상과 우정을 되새기게 된다. 사르트르는 사회적, 사교적 지위도 어느덧 노쇠함과 더불어 퇴색되게 되고 곁을 지키던 부인 보부아르를 통해 간접적이나마 카뮈와의 관계, 우정에 대한 기억과 회상을 듣는다. 20세기 지성계의 두 거장이었던 사르트르와 카뮈는 사상과 철학, 문학작품으로 일세를 풍미했다. 또한 각자 독특한 개성과 신념에 의해 우정을 쌓기도 하고 기회에 따라선 변절의 과정을 거치며 서로를 비난하며 대립과 배신이 이어졌다. 그렇지만 진정 사회를 대표하는 공인(公人)으로서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사회의 구조 및 문화에 영향을 미치고 책임과 참여, 자유란 무엇인지를 새삼 일깨워 주는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두 거장을 통해 그들이 남긴 우정을 비롯하여 상호간의 영향과 증오, 수많은 주제들의 흔적을 살필 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