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

생애

1913년 알제리의 몽드비에서 아홉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노동자였던 아버지가 1차 세계대전 중에 전사한 뒤, 청각장애인 어머니와 할머니 아래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공립초등학교와 알제대학교 철학과에서 공부한 그는 1936년에 고등교육 수료증을 받고 교수가 되려고 했지만 결핵이 재발해 단념하고, 졸업 후 진보적 성향의 일간지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1913년 11월 7일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콩스탕틴 현 몽드비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농사꾼이었던 아버지 뤼시앵 카뮈는 아들이 태어난 다음 해에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했다가 마른 전투에서 전사했다. 어머니 카트린 생투아는 스페인 출신으로 프랑스어를 전혀 몰랐다. 그녀는 남편이 죽은 뒤 두 아들 뤼시앵과 알베르를 기르기 위해서 갖은 고생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두 아들을 데리고 알제리 시의 서민들이 사는 동네 벨쿠르에 있는 친정 어머니의 아파트로 갔다. 그녀는 그곳에서 배우 출신의 오만한 늙은 친정 어머니와 포도주통 만드는 게 직업인 거의 벙어리와 다름없는 남동생과 함께 방 두 개에 다섯 식구가 사는 가난한 생활을 해 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불만을 품거나 남을 원망하지 않고 빈곤을 견뎌 나갔다. 후에 카뮈가 “내가 자유를 마르크스 속에서 배우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나는 가난 속에서 자유를 배웠다”고 술회했듯이 빈곤한 생활이었지만 카뮈는 고향에 대해서 일평생 변함없는 사랑을 바쳤다.

카뮈는 1918년에서 1923년까지 초등학교 과정에서 뛰어난 재능을 나타내어 담임교사 루이 제르맹의 총애를 받았다.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담임교사가 카뮈에게 특별히 개인지도를 해 주기까지 했다.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이 책으로 출판되었을 때 카뮈는 이 책을 옛 스승에게 바쳐 깊은 감사를 표명했다.

1923년 그는 프랑스의 중등학교인 리세에 들어갔으나 빈부격차를 크게 느꼈고 어머니가 하녀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했다. 후일 알제리 대학에 입학했으나 1930년 폐결핵으로 중퇴했다. 재학 중에도 각종 임시직을 전전했으며 대학 중퇴 이후에도 가정교사, 자동차 수리공, 기상청 인턴과 같은 잡다한 일을 했다. 이 시기 평생의 스승인 장 그르니에를 만났다. 그는 1935년 플로티누스(Plotinus)에 관한 논문으로 철학 학사 학위 과정을 끝냈다. 그 동안에 그는 아마추어 극단을 주재했다. 가난했지만 멋을 부릴 줄 아는 멋쟁이였으며 축구팀 골키퍼를 할 정도로 운동을 좋아했다. 훗날 외모 면에서 종종 험프리 보가트에 비교되곤 했다.

1935년 카뮈는 명백히 마르크스주의의 강령에 대한 지지보다는 에스파니아 내전의 원인이 된 스페인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관심 때문에 프랑스 공산당에 들어갔다. 1936년 좀 더 독립적인 성향의 알제리 공산당이 수립되자 카뮈는 알제리 공산당에 가입했고, 이로 인해 그의 공산당 동료들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그 결과 그는 트로츠키주의자로 비난받았고 1937년 당에서 제명되었다. 그는 그후 공산당의 교조적인 태도를 극단적으로 혐오했다.

1934년 시몬 이에(Simone Hie)와 결혼했으나 서로간의 불륜과 시몬의 모르핀 중독으로 인해 1940년 이혼한다. 1940년 카뮈는 수학자이자 피아니스트인 프랑신 포르(Francine Faure)와 재혼했다. 비록 그는 프랑시느를 사랑했지만 카뮈는 결혼제도에 대하여 극렬히 반대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결국 이 부부의 관계는 비끄덕 거렸다. 심지어 프랑시느가 1945년에 케서린과 잔이라는 쌍둥이 아이를 낳은 후에도 혼외 관계를 가졌다. 그 중 널리 알려진 스페인의 배우 마리아 카자레스와의 부적절한 관계도 있었다. 이러한 카뮈의 불륜은 아내 프랑신에게 더 큰 고통을 주었다.

카뮈는 1935년부터 1939년까지 운영된 ‘노동자의 극장'(Théâtre du Travail)을 설립했다. 공산당과의 결별 이후에도 이 극단은 에키프 극단으로 이름을 바꾸어 지속되었다. 1937년부터 1939년까지 그는 사회주의자를 위한 소품을 썼으며, 1938년부터는 좌익 성향의 신문 알제 뤼페블리껭(Alger-Republicain)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문화기사와 르포를 주로 썼다. 사르트르의 책 ‘구토’에 대한 서평도 알제 뤼페블리껭에 쓴 것이다.

알지에 대학교의 학생시절에 장학금을 받았으나 집으로부터 생활비를 받을 수 없었던 그는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다. 대학의 기상반에 들어 남부 지방의 기압 상태 조사에 참가하기도 하고, 자동차의 부품 판매원 노릇도 하고,《이방인》의 뫼르소처럼 해운업자에게 고용되기도 했다. 또한 현청의 사무원 노릇을 하기도 하면서 순수한 대학생활에서는 해볼 수 없는 귀중한 체험을 했다. 이렇게 힘들고 바쁜 생활 가운데에서도 지드, 말로, 몽테블랑 등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탐독했고 체코슬로바키아, 이탈리아로 여행을 했다. 그리고 알지에 문화관을 주관하기도 했으며, 특히 연극 활동에 참가하기도 했다. 아마추어 극단을 꾸며서 배우로 무대에 서기도 하고 연출도 했으며 말로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각색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때 수필집《표리(表裏)》를 쓰기 시작하면서 정치극《아스튀리의 반란》을 공동집필했다.

1936년 플로티노스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을 통해 본 헬레니즘과 그리스도교와의 관계를 쓴 졸업논문 <그리스도교와 신 플라톤주의의 형이상학>이 통과되었다. 이 시기의 카뮈는 앙드레 말로에 관한 평론을 쓰려고 시도해 보기도 했다. 당시의 대학교수 자격시험 응시는 건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17세 때 앓던 폐결핵 재발에 시달려 철학교수 자격시험을 포기해 버렸다. 졸업 후에는 파스칼 피아의 추천으로 극좌파의 기관지인 일간지 「알지에 레퓌블리캥」신문사에 입사하여 잡보기사에서 논설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의 기사를 쓰면서 여론의 옹호자로서의 태도를 견지해 나갔다.

1938년에는 인생과 자연의 결합을 주제로 한 서정적 에세이《결혼》을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알제리 풍경의 강한 인상을 정열적으로 그리고, 반짝이는 대낮의 태양을 쬐며 미지근한 바닷물에 잠겨 자연과 한 덩어리가 되는 인간의 희열(喜悅)을 그렸다. 이 싱싱한 청춘의 노래는 그보다 한 해 전인 1937년에 나온 최초의 수필집《표리》와 죽은 후에 출판된 수첩 1 <태양의 찬가>와 함께 그의 지중해적인 사상과 감정의 형성을 보이는 중요한 문헌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카뮈는 군대에 들어가기 위해 지원했으나 건강 상태가 나빠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40년「알지에 레퓌블리캥」에 카뮈가 집필한 북아프리카 문제에 관한 기사가 당국의 비위를 건드려서 카뮈는 알지에에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되었다. 다시 한 번 파스칼 피아가 추천하여「파리 수아르」신문사의 기자로 입사하여 1941년 6월까지 근무했다. 그는 이 때《이방인》을 탈고하여 에세이《시지프스의 신화》를 쓰기 시작했는데, 때마침 독일군의 파리 입성이 있었다. 에세이《시지프스의 신화》가 탈고되었으며 1942년 갈리마르 출판사를 통해《이방인》을 출간하는 한편, 말로, 지드, 사르트르 등과도 사귀었다.

당시에 그는「콩바」지에 관여하며 독일군 점령 하에서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가하고 있었는데, 이 때 비밀리에 출간된《이방인》은 2차 세계대전 전후에 발표된 어떤 작가의 어떤 작품보다도 선풍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이방인》은 현대사회의 메커니즘 속에 처져 있는 모순과 현대인의 생활감정 가운데에 잠긴 부조리(不條理)의 의식을 명확하게 표현한 작품이며. 고독감과 인생의 모순을 고백적 감상 형식으로 해설한《시지프스의 신화》와 함께 큰 감동을 불러일으켜 광범위한 독자를 확보하여 일약 카뮈의 이름을 국제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소위 포니 워(Phony war)라고 불리는 시기에 카뮈는 반전론자였다. 그러나 그는 1941년 11월 15일 파리에서 베르마흐트(독일육군)가 저지른 가브리에 페리의 처형을 목격하고 독일에 대한 저항을 굳혔다. 그 후 그는 보르도로 이동하여 그 근교에서 파리스와의 활동을 끝냈다. 카뮈는 연합군이 파리를 해방한 1943년 신문의 편집자가 되어 전투 이후를 보도했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 편집인으로서는 드물게 1945년 8월 8일에 일어난 사건 직후에 히로시마 원자폭탄 사용에 대한 반대를 주장하는 논설을 실었다. 카뮈는 콩바가 상업적인 신문이 되자 1947년 사임해 버렸다. 이때부터 카뮈는 장 폴 사르트르와 가깝게 지내기 시작했다.

전쟁 이후에 카뮈는 사르트르와 함께 생제르망 가에 있는 카페 드 플로르(Café de Flore)를 자주 찾아갔다. 카뮈는 프랑스적 사고에 대한 강의를 하기 위해 미국을 여행하기도 했다. 비록 그는 좌익의 정치학을 배웠지만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강한 비난으로 인해 사르트르와 소원해지게 되었다. 1949년 카뮈의 폐결핵이 재발하여 2년간 은둔상태로 살았다. 1951년 그는 공산주의에 대하여 명쾌하게 반대하는 반란과 반역에 관한 철학적 분석의 내용을 담은《반항하는 인간》을 발표했다. 이 책은 프랑스에 있는 그의 많은 당시 동료들을 화나게 했고 결국 사르트르의 기분도 상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반응은 카뮈를 화나게 만들었고 그는 연극들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철학에 대한 카뮈의 기여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시지프 신화》에서 설명하고《이방인》과《페스트》와 같은 작품에서 설명한, 바로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은 상태, 세계의 의미, 정순함에 대한 우리의 열망의 결과에 따른 부조리에 대한 그의 생각이다. 그의 학문적 동반자 사르트르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카뮈가 실존주의자들의 캠프로 굴러 떨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그의 에세이 에니그마와 다른 작품들을 통해 그에 대해 이념적 꼬리표를 붙여 분류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 중 많은 중요 부분은 실존주의와 깊은 관계가 있다.

작품으로는 <이방인(異邦人)>, <시지프의 신화>로 사상가로서의 인정을 받았고, 극작가로서는 해방 후 <오해>(1944)와 <칼리귤라>(1945)로 성공을 얻었다. <계엄령(戒嚴令)>의 각색이 바로에 의해 상연되고, 그 다음에는 <정의의 사람들>이 나왔는데, 작품 수는 얼마 안 되지만 순도(純度)가 높은 고전적 문체의 실존주의 연극으로 호평을 받았다. 그 후에는 자작보다는 각색· 번안 등에 힘을 쏟아, 라리베의 <정령>, 칼데론의 <십자가에의 예배>,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 등이 있다. 1957년 그는 사형에 반대한 에세이《단두대에 관한 성찰》을 써서 세상에 내놓았다.

1950년 카뮈는 인권 운동에 자신의 전력을 다 바쳤다. 1952년 UN이 프랑코 치하에 있는 스페인을 회원국으로 받아들이자 UNESCO의 임원직을 버렸다. 1953년 그는 동베를린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을 분쇄한 소비에트 연방의 방식을 적극 비난했다. 1956년 그는 폴란드에서 일어난 같은 방식의 파업분쇄와 소비에트 연방이 10월 헝가리 반란을 진압한데 대하여 저항의 소리를 냈다. 카뮈는 그의 평화주의와 세계 어디에서든 일어나고 있는 사형에 대한 저항을 계속 부르짖었다. 사형 반대 운동에 대한 그의 주목할 만한 기여로 사형반대협회의 설립자인 아서 쾨슬러(Arthur Koestler)와 협동하여 쓴 에세이가 있다.

1954년에 들어서면서 알제리 독립전쟁이 발발했다. 프랑스령인 알제리에는 여전히 그의 어머니가 살고 있었기 때문에 도덕적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알제리계 프랑스인(pied-noirs)의 정체성을 택하여 프랑스 정부를 옹호했다. 그는 북아프리카 식민지의 반란이 이집트주도의 신 아랍 제국주의와 소비에트연방의 정책인 “유럽 둘러싸기”, “고립된 미국”, “반 서방주의”의 일부분이라고 주장했다. 카뮈는 알제리에 더욱 큰 자치권을 인정하거나 연방정부를 구성하면 알제리계 프랑스인과 아랍인들 간의 공존이 이루어 질 것이라고 믿었으며, 알제리의 완전 독립에는 부정적이었다.

전쟁 기간 동안 그는 프랑스와 알제리 양측 모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정전협정을 위하여 헌신했다. 이러한 활동 뒤에 그는 사형에 직면한 체포된 알제리인들을 구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활동했다. 그는 1957년 스톡홀름 대학교 학생들을 상대로 강의하며 알제리 문제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피력해 보였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알제리에 살고 있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염려된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은 프랑스의 좌익 지성으로부터 더욱 극심한 배척을 야기하고 말았다.

1942년 7월 존재의 부조리성(不條理性)을 다룬 《이방인》과 동일한 주제를 철학적 에세이로 풀이한 《시지프 신화(神話)》를 발표하면서 주목받는 작가로 떠올랐고, 이어 《페스트》(1947)의 출간으로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1951년에는 마르크시즘에 반대하는 내용을 담은 평론 《반항하는 인간》을 발표하여 사르트르를 포함한 프랑스 문인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1957년 마흔네 살의 젊은 나이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카뮈는 장편소설 《최초의 인간》 집필 작업에 들어갔으나, 3년 후인 1960년 자동차 사고로 생을 마쳤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표리(表裏)》(1937), 《결혼》(1938), 《정의(正義)의 사람들》(1949), 《행복한 죽음》, 《안과 겉》, 《적지와 왕국》, 《전락(轉落)》(1956), 희곡 《오해(誤解)》(1944)와 칼리굴라(Caligula)》(194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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