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언 반스

Julian Patrick Barnes

저자 소개

  1946년 영국 중부의 레스터에서 태어났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현대 언어를 공부한 반스는 1969년에서 1972년까지 3년간 옥스퍼드 영어 사전》 증보판을 편찬했다. 이후 《뉴스테이츠먼》과 《뉴 리뷰》 등의 잡지에 평론을 기고하는 한편 문예 편집자로 일했다. 줄리언 반스는 탄탄하게 다져진 공력을 드러낸 첫 장편소설 《메트로랜드(Metroland/1980)》 로 서머싯 몸 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등단한다. 장편소설, 단편소설집, 수필, 회고록을 여러 권 펴냈다. 그의 장편소설과 단편소설들은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전범으로 간주되고 있다. 또한 댄 캐버나라는 필명으로 범죄 소설을 썼으며, 도데와 플로베르를 번역하기도 했다. 그가 1980년에 발표한 처녀작 《메트로랜드》는 1960년대의 반항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젊은 세대의 운명을 묘사한 것이다. 그는 이 작품으로 서머셋몸 상을 받았다. 《10 1/2장으로 쓴 세계 역사(A History of the World in 10 1/2/1989)》는 전투적인 무신론과 신비적인 신앙을 교묘하게 조화시키면서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대담하게 해석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 바다와 관련된 모티브는 계속 변주되며 나타난다. 반스가 제기하는 철학적 질문들은 독자의 마음을 뒤흔든다. 반스는 사랑 이야기를 쓰는 데 능숙한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은 지나치게 냉소적이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반스는 인간 상호간의 관계의 문제를 깊이 있게 응시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의 아이러니한 스타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내 말 좀 들어봐》와 《사랑, 그리고》에서 그는 남녀 관계를 묘사하면서 모든 등장인물들이 각자 자신의 시점에서 이야기 하게끔 했다. 이것은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와 이노우에의 《엽총》에서 시도되었던 수법과 같다. 그의 소설들은 그에게 각국의 중요한 문학상들을 안겨 주었다. 프랑스에서는 《플로베르의 앵무새》로 메디치상을, 《내 말 좀 들어 봐》로 페미나상을 받았다. 독일에서는 1993년 함부르크의 퇴퍼 재단에서 주는 셰익스피어상을 받았다. 《플로베르의 앵무새》는 창작 과정에서 작가의 역할에 대한 극히 유쾌한 연구라 할 수 있다. 《고슴도치》는 동유럽의 어느 국가(이름은 언급되지 않는다)에서 벌어진 공산 독재자에 대한 재판을 다룬 것으로, 불가리아의 지프코프의 재판을 모델로 했다. 2011년에는 단편집 《Pulse》로 데이비드 코헨 문학상을,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로 맨부커상을 수상했다.

저서

『나를 만나기 전 그녀는(Before She Met Me/1982)』

『플로베르의 앵무새(Flaubert’s Parrot/1984)

『태양을 바라보며(Staing at the Sun/1986)』

『10 1/2장으로 쓴 세계 역사(A History of the World in 10 1/2/1989)』

내 말 좀 들어봐(Talking It Over/1991)』

『고슴도치(The porcupine/1992)』

『크로스 채널(Cross Channel/1996)』

『잉글랜드, 잉글랜드(England, England/1998)』

『사랑, 그리고(Love, Etc/2000)』

『레몬 테이블(The Lemon Table/2004)』

『아서와 조지(Arthur&George/2005)』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The Sense Of  An Ending/2011)』

소설은 1960년대 고등학교에서 만난 네 소년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1인칭 화자인 주인공 토니 웹스터와 그의 패거리 친구 앨릭스, 콜린 그리고 총명하며 지적인 전학생 에이드리언 핀. 세 소년은 핀을 선망하고, 학교의 모든 교사들은 낭중지추와도 같은 에이더리언의 탁월한 지적 능력과 독특한 시각을 눈여겨보며 그를 아끼게 된다.

주인공 토니는 젊은 시절 교사의 질문에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 이라고 답하나, 노년에 이르면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가깝다’ 고 번복한다. 줄리언 반스는 허구를 통해 이렇듯 평범하고 어리석어 발언권을 얻지 못했던 ‘대부분의 인생’ 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인간적인 위트와 깊은 회한을 통해, 궁극의 휴머니즘으로 그것을 감싸안는다. 비수처럼 아픈 성찰과 자조가 전하는 묘한 치유력에는 읽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지나온 시간과 다가올 미래를 납득하고 살아가게 하는 힘이 있다.

이 작품이 부커상을 둘러싼 크고 작은 논란을 단순에 종식시킨 것도 바로 그런 점에서일 것이다. 소설의 길이나 가독성의 문제가 문학이냐 아니냐를 판단할 기준이 될 수 없다. 그렇듯 반드시 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하여 역사에 길이 남을 고전으로 자리 잡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독성’ 이라는 말로 문단을 떠들썩하게 했던 맨부커상 심사위원장 스텔라 리밍턴은 맨부커상 시상식장에서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영문학의 고전이 될 것이다. 두 번 세 번 거듭해 읽을 수 있는 작품은 많지 않다. 그러나 이 소설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 깊이를 드러낸다.”

주인공인 토니 웹스터는 문학사상 가장 신뢰할 수 없는 인물 중 하나다. 그는 마음에 스친 불쾌한 인상 하나 때문에, 혹은 돌연히 마음에 깃든 한 점 의심의 그림자로 인해 주변 사람들을 곡해하고 그들의 뜻을 왜곡하여 독자에게 전한다. 그로 인해 소설의 절반쯤 지나게 되면 읽는 이는 토이 웹스터의 시각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작품 행간에 숨겨진 뜻을 독자적이고 객관적인 시점으로 읽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그의 운명을 생각할 때 이토록 단점이 많은, 그러나 우리 자신과 닮은 ‘대부분의 인생’ 을 동정하고 위로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의 테마인 ‘왜곡된 기억’ 은 줄리언 반스가 논픽션인 《두려워할 것은 없다》 에서 철학자인 자신의 형 조너선 반스와의 쉽지 않은 관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다루었던 주제이기도 하다. 역사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교사의 질문에 에이드리언이 (작가가 만들어낸 소설 속 허구의 역사학자인) 라그랑주를 인용해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 이라고 대답하는 지점에서 작가의 성찰은 시작된다. 

우리가 인류의 진실한 도정이라 믿는 역사는 사실 역사학자 개인의 해석이 담긴 ‘허구’ 에 가깝다는 테마는 반스의 다른 여러 전작에서도 거듭되어 왔다. 이는 대문자 역사뿐 아니라, 우리 개인의 이야기가 집성된 개인사에서도 다르지 않다. 그리고 우리가 기억을 왜곡하는 만큼 우리의 운명은 기억에 의해 잔혹하게 농락당한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의 원제는 《The Sense Of An Ending》 이다. 우리말로는 ‘결말의 느낌’, ‘결망의 예감’ 쯤 될 것이다. 끝까지 ‘감을 잡지 못하는 주인공’ 이 등장하는 이 소설의 두 가지 제목은 사뭇 반어적이다. 하지만 이 반어는 냉소가 아니라 인간적 공감에 바쳐진 것이다. 이 책은 한평생 ‘문학의 소재가 된 적’ 이 없는 평범한 삶을 살아온 사람, ‘비굴하게 살아남아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의 이야기다.

《플로베르의 앵무새》 의 서술자인 브레이스웨이트는 은퇴한 영국 의사로 플로베르에 대한 아마추어 연구자이다. 이제 한가해진 그는 아내와 사별한 후 평소 각별한 관심을 가졌던 플로베르에 대한 자료 조사를 하고자 불란서 노르망디 지방에 있는 플로베르의 고향 루앙을 5일간에 걸쳐 방문한다.  플로베르가 <순박한 마음> 을 쓸 때 모델 역할을 했던 박제 앵무새를 찾아 박물관에 간 제프리는 박제 앵무새를 보고 흠모하는 플로베르를 만난 양 감동한다. 그러나 그가 크루아세에 있는 또 다른 박제 앵무새를 보게 된다. 두 곳 박물관의 관리인들은 서로 자신들의 박제 앵무새가 플로베르의 창작에 영감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브레이스웨이트는 좀 더 세삼하게 이 대 작가를 연구해보고자 결심한다. 

내러티브의 주 초점은 이 앵무새를 추적하는 것이지만 많은 장이 이 줄거리와 독립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거기서 다뤄지는 내용은 플로베르의 애정 생활과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기차에, 플로베르의 작품에 등장하는 동물의 형상에, 그리고 자신이 동일시했던 동물 (대체로 곰) 에 영향을 받았는가에 대한 제프리의 사색으로 되어 있다.

박제 앵무새를 모티브로 풀어 나가는 플로베르에 대한 탐구는 시공을 초월하고, 플로베르 작품 속 시간까지 함께 아우르며 진행된다. 플로베르의 작품과 발언에 근거한 의사 연대기, 플로베르 외전, 동물 열전, 플로베르를 받아들이는 현대인들의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 등 만화경 같은 다양한 형식의 글이 이어진다. 줄리언 반스는 전통적인 플롯 위주의 이야기 구조를 해체하며 사실주의 소설의 대가 플로베르의 초상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히 창의적인 플로베르 평전에 머물지 않는다. 예술의 자장 안에서 벌어지는 작가와 비평가와 독자 사이의 상호관계, 생활과 예술, 작가와 작품의 상관관계 등 예술 작품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인간 사회의 모든 양상을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그려낸다. 작가의 대담한 시도는 제프리 페이버 기념상 (영국), 메디치상 (프랑스), 미국 문예 아카데미 E. M. 포스터상 (미국), 구텐베르크상 (독일) 등을 수상함으로써 그 성과를 인정받았다.

《플로베르의 앵무새》 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전형이자 줄리언 반스를 단숨에 유명작가로 만들어버린 작품이다. 소설 속에서는 작가의 역작답게 단숨에 써내려간 듯한 당당함이 엿보인다.

이 소설의 중심 주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주제인 ‘진정한 것을 발견할 수 없음’ 이다. 예를 들어 소설은 플로베르의 삶을 세 가지 계기로 구분하고 있다. 첫째는 낙관주의 (그의 성공, 그의 정복 등등), 둘째는 비관주의 (그의 친구와 연인의 죽음, 그의 실패, 지병 등등), 셋째는 그의 인생의 여러 순간에 쓴 일기에서 발췌한 인용문으로 이뤄져 있다. 진정한 플로베르를 발견하려는 시도는 그의 앵무새를 발견하려는 시도와 함께 헛된 노력이었음이 분명해진다. 이 주제는 엠마 보바리의 눈에 대해 이야기할 때 다시 나타난다. 플로베르는 그녀의 눈동자에 (실수로) 세 가지 다른 쌕깔을 부여했던 것이다.

이 소설은 플로베르와는 거의 관계가 없다. 하물며 앵무새들은 더더욱 관계가 없다. 오히려 브레이스웨이트와 자신의 영웅에 너무 가까이 다가갈 경우 자기 자신에 불편할 정도로 가까워진다는 위험에 대해 이야기한다. “모든 예술은 자전적이다” 라고 화가 루시앙 프로이트는 말했다. 또 예술은 자서전의 기술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브레이스웨이트는 비극적인 인물이다. 그는 인생에 무감각하며, 자신의 추억과 감정들을 무시한다. 그는 너무나 공허하여 한 인간보다 훨씬 더 안전한 것에 헌실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다.

 

플로베르 탐구에의 여정은 궁극적으로 사실과 진실을 찾고자 하는 여정이다. 이 여정의 시작에서 브레이스웨이트는 이 사실주의 작가의 주장대로 개인의 감정을 배제하고 서술자의 편견 없이 사실에 근거한 엄정함을 기하고자 한다. 그러나 브레이스웨이트는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이란 오직 언어뿐이라는 것을 아게 된다. 그는 이 작가가 죽은 지 100년이나 되었으며, 이제 그에 대하여 남은 것이라고는 오직 기록, 생각, 구절, 은유, 소리로 바꿀 수 있는 구조가 잡힌 산문만이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과거를 과연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을 것인가를 의아해하며 “과거는 마치 기름으로 뒤범벅이 된 돼지새끼” 와도 같다고 말한다. 서로 다른 서술양식을 보이는 《플로베르이 앵무새》 의 각 장은 플로베르에 대한 독특한 전기 쓰기의 시도로 볼 수도 있는데, 실존의 인물과 사건이 글쓰기를 통하여 어떻게 재현되는지를 보여준다. 문학에서 역사적 사실을 담아낸다면 이것은 실제적인 일을 다루기 때문에 리얼리티의 재현의 문제에 있어 순수한 픽션 보다 서술의 역할과 본질을 더 생경하게 느낄 수가 있기 때문이다.

플로베르에 대한 브레이스웨이트의 탐구는 먼저 연보의 형식으로 시작한다. 플로베르의 삶을 엄격하게 사실만을 기록하는 연보를 통해 간추려 보는데, 더욱 공정함을 기하기 위해서 세 타입의 연보를 제시한다. 

연보 1 은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연보의 형식을 취하여 작가의 공적과 업적, 사회적 활동과 공헌의 내용이 주종을 이룬다. 여기서 플로베르는 사회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은 천재적인 작가로서 명예스럽게 한 평생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연보 2 는 첫 번째 것과는 대조적으로 전반적으로 고통스럽고 어두운 생애를 그린다. 가족들의 죽음, 퇴학, 법과대학시험에서의 낙제, 간질과 매독 같은 질병, 이루지도 보상받지도 못했던 젊은 시절의 짝사랑, 그의 작품에 가해졌던 친구들의 야우, 재산상실과 같은 고통스러운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연보 3 은 위의 두 연보와는 달리 일인칭 서술의 독백 형식으로 플로베르 자신이 직접 자신의 감정을 토로한다. 이 연보는 그가 21세 되던 해인 1842년부터 시작한다. 연보 3 에서는 1846년, 곧 플로베르가 연인인 루이즈 콜레를 만났던 해에 큰 비중을 둔다. 그녀와의 관계는 연보 1 이나 2 같은 공적인 성격의 기록에서는 사소하게 처리되거나 아니면 부정적으로 그려져 있다. 반면 사적인 면을 중시하는 연보 3 에서 1846년에 대한 항목이 무려 아홉 차례나 계속 나온다. 또한 1853년에 대해서도 연보 1 과 2 에서는 플로베르가 사회적으로 교류가 빈번해지고 명망을 얻어가는 사회적 진출의 시기로 나타나는데 비하여 연보 3 에서는 이 시기에 플로베르는 사회로의 진입이 자신의 집필작업에 방해가 되고 있다고 여기며 파리로 이사하는 것을 주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플로베르가 세상을 뜬 해인 1880년은 연보 3 에서는 마치 “오래된 카망베르(치즈) 처럼 녹아 버릴 것 같다” 는 플로베르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작품을 완성하기 위하여 사투하는 그의 모습이 부각되어 있다. 연보 3 에서 보는 플로베르는 죽는 순간까지 작품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다.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고달프고, 외롭고, 힘들었던 생을 보낸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 장에서 다시금 언급되는 앵무새에 대한 이야기는 리얼리티의 다원적 읽기에 대한 표상이라 하겠다. 브레이스웨이트는 여기서 플로베르의 앵무새에 대하여 “펠리시테가 그것을 성령으로 간주하는 것은 괴상하긴 해도 논리적인 해석이었다. 나에게는 그것은 날아다니는, 포착할 수 없는 작가의 목소리에 대한 상징물이었다” 라고 생각한다. 이 말은 포착불가능한 작가의 복합적인 목소리를 암시하기도 하고, 예술작품에 리얼리티를 재현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앵무새의 목소리처럼 불완전한 작업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작품의 끝에서 브레이스웨이트는 플로베르가 사용했을 법한 박제 앵무새가 어쩌면 50마리 중 하나일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게다가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세 마리 뿐인데 이들의 화려한 빛깔은 지금은 살충제 먼지를 뒤집어 쓰고 희미하게 퇴색되어 마치 “비듬투성이 머리를 한 천박한 세 영감” 같이 보였다고 그는 말한다. 플로베르의 예술에 힘입어 펠리시테가 성스러운 존재로 이해했던 앵무새의 실제 모습은 형편 없는 박제 앵무새에 불과했던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외부의 대상물이 아니라 이것에 대한 작가의 이해였다.

삶의 현상, 표면적 사실(fact/factual document) 과 이에 대한 예술적 재현이 이처럼 다르다면 어느 편에 손을 들어줄 것인가의 문제가 남는다. 이 둘 중 그 어느 쪽에 더 가치를 둘지는 죽음으로 치달았던 엘렌의 경우와 “어두운 심연” 을 내려다보면서도 침착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플로베르의 경우에서 보는 차이가 말 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