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1913. 11. 7. ~ 1960. 1. 4)
카뮈의 생애
카뮈의 작품세계
저서
《이방인》, 《페스트》, 《전락》, 《시지프 신화》, 《반항하는 인간》, 《결혼》, 《단두대에 대한 성찰》, 《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여름》, 《오해》, 《작가수첩》, 《시사평론》, 《정의의 사람들》, 《칼리굴라》, 《계엄령》, 《스웨덴 연설》, 《문학 비평》, 《태양의 후예》, 《최초의 인간》, 《젊은 시절의 글》, 《안과 겉》, 《여행일기》, 《적지와 왕국》
수상
1957 노벨문학상
평범한 월급쟁이 뫼르소는 어머니가 죽은 다음 날 여자 친구와 해수욕을 하며, 희곡 영화를 본 뒤 하룻밤을 같이 지낸다. 어느 날 바닷가에서 친구와 말다툼을 하고 있던 아라비아 사람을 권총으로 사살한다. 뫼르소는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지만 왜 죽였느냐는 재판관의 질문에 ‘태양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그는 재판관에게도, 검사에게도, 변호사에게도, 나아가서는 모든 일상사에 대해서까지 무관심한 태도를 보인다. 최종적인 판결은 사형이었다. 그는 재판도, 세상도 얼마나 부조리하고 우스꽝스런 것인가를 느끼고 교화신부(敎化神父)도 거부한 채 고독한 이방인으로서 사형날을 기다린다.
사형집행의 전날 밤 ‘과거에도 행복했지만 지금도 역시 행복하다’고 말하며 ‘증오심을 발하여 자기의 사형 집행을 보기 위하여’ 단두대 둘레에 많은 군중이 모여 줄 것을 원한다. 그리고 독방의 창으로 내려다보이는 별빛 찬란한 하늘, 자연, 인간에 대해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고, 그것이 그의 인생에 대한 무관심과 일치한다고 생각되어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낀다.《이방인》은 그리 긴 소설은 아니지만 상당한 기간을 두고 구상되고 집필된 것으로 여겨진다. 카뮈의 ‘비망록’을 보면 1935년 5월부터 벌써 ‘여러 해를 비참하게 살고 난 다음에 아들이 어머니에게 보이는 야릇한 감정’이라는 것을 적어 놓았고, 1936년 1월에는 간결하게 적혀 있는 여섯 개의 이야기 속에 사형수의 이야기가 나오며 또 한두 부분이 대칭을 이루는 형태를 갖추도록 소설이 구상된 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 보인다.
1939년에 완성되었으나 포기하고, 1971년에야 사후 발표된 습작《행복한 죽음》의 주인공은 뫼르소라는 이름이었는데 그것은 카뮈가 항상 매혹된 우주의 두 가지 위대한 힘, 바다(mer)와 태양(solei)을 합성하여 만든 것으로 생각되며, 그 후신이 바로《이방인》의 뫼르소인 것이다. 1936년 3월에는 벌써 ‘비망록’에 중요한 주제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8월의 기록에는《이방인》이라는 제목까지 찾아낸 흔적이 있다. 1938년 5월에는 마랑고의 양로원에 은퇴한 노파의 죽음과 장례에 관한 이야기가 있고, 1940년에는 살라마노와 그의 개 이야기가 나오며, 5월에는 ‘이방인은 끝났다’는 말이 적혀 있다. 카뮈 자신은《이방인》에 대해서 ‘이 책의 의미는 두 부분의 대응 속에 들어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은 똑같은 살인 이야기를 제1부에서는 그것을 저지른 사람이 이야기하고 제2부에서는 사회가 판단하는 것으로 전개해 나가려고 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 뫼르소는 여러 가지 사회적 상황이 자신에게 어떤 반응을 보여줄 것을 기대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사회는 그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자식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감정을 나타내 보이고 장례식이 끝난 다음에는 어느 정도의 근신 기간을 두었다가 여자 친구와 관계를 맺어야 하며 직장에서는 승진하고 싶어한다는 시늉을 해 보이고 여자 친구에게는 빈 말로라도 사랑한다는 말을 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뫼르소는 시종 무감각한 태도를 보인다. 그는 아랍인과 시비를 벌이고 있으며 별로 떳떳하지 못한 직업에 종사하는 아파트의 이웃 사람이 졸라대는 바람에 그와 친구가 되고 그 친구와 반목하고 있는 아랍인과 마주쳐 대치하다가 대낮의 사정없이 내리쬐는 태양 때문에 눈이 아물거려서 아랍인을 사살하게 된다.
이 우발사고는 일련의 비합리적 상황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런데 재판에서는 살인이 계획적인 것인지 아닌지에 따라서 유죄 또는 무죄의 판결이 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검사가 밝혀 낸,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 때 보인 감정적 반응과 장례식 직후의 뫼르소의 행동은 사회가 위험시하고 충분히 적대시할 만하다. 따라서 배심원들은 그에게 사형판결을 내린다. 뫼르소 자신은 전에 자기가 저지른 행동과 검사가 법정에서 재구성한 자신의 범죄 사이에 아무런 관련도 찾아낼 수 없어서 마치 방관자 같은 심정으로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을 본다. 일단 사형선고가 내리자, 뫼르소는 인간이 이 세상에서 처해 있는 상황의 부조리성을 충분히 의식하고 이에 반항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카뮈가《이방인》에서 취급한 주제는 이와 같은 부조리에 대한 가장 깊은 통찰이며 가장 신랄한 고발인 것이다.
사르트르의 말을 빌리면《이방인》은 ‘건조하고 깨끗한 작품, 외관상으로는 무질서하게 보이지만 잘 짜인 작품이며 너무나 인간적인’ 작품인 것이다. 이 작품이 발표된 당시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프랑스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이 사회적·정신적으로 혼란한 기류에 휩싸여 있었다. 양차대전을 통하여 인간의 가치관은 급변했고, 사람의 목숨이란 그렇게 귀중하지 않은 것처럼 수없이 죽어 갔다.《이방인》이 발표되자 실존주의의 문학적 승리로써 세계적으로 실존주의 작품의 선풍을 불러일으켰다.《이방인》이 현대의 대표적인 작품의 하나로 애독되는 것은 그것이 부조리에 직면한 인간의 굴욕을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제리의 오랑시에 페스트가 만연했다는 가정을 설정하고 그것을 기록해 나가는 형식으로 된 장편소설로서, 그 서술법이 극적 효과를 자아낼 만큼 사실적 묘사에 그 바탕을 두고 전개된다. 어느 날 아침 의사 베르나르 류가 자신의 진찰실에서 나오다가 한 마리의 죽은 쥐 때문에 놀라는 장면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뒤이어 원인을 알 수 없는 열병환자들이 속출하여 시내는 일대 혼란에 빠진다. 이윽고 페스트의 선고가 내려지고 오랑은 다른 지역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되어 버린다. 도시의 폐쇄는 어머니와 아들, 남편과 아내, 연인들 등, 그럴 생각은 꿈에도 없었던 사람들을 용서없이 분리시켜 버리고, 모든 시민들은 제각기 페스트와 대결하게 된다.
몇 개의 군상이 그려지고 몇 개의 인간의 극한 상황에 수반되는 본질 노정이 이루어진다. 교회 수뇌부는 집단 기도 주간을 마련하고, 판느루 신부는 모든 것 속에 선과 악, 노여움과 연민을 내리시는 신이 커다란 자비를 위해 지금 죄 많은 시민 위에 페스트와 구제를 내리신 것이니 죽음과 오뇌와 규환(叫喚)의 걸음을 통해 본질적인 정적으로 모든 생의 본의(本意)로 돌아가라고 설교한다. 오랑의 호텔에 몇 주 전부터 숙박하고 있던 타루라는 사나이는 류를 방문하여 지원 보건대를 조직하겠다며 나서며 활발히 일을 진행시킨다. 그들은 페스트라는 악과 부정과 폭력을 앞에 두고 강한 결속을 이룬다.
특히 류와 타루는 굳은 우정으로 맺어져 필사적으로 페스트와 싸운다. 오랜 투쟁 활동 뒤에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무렵, 생기에 찬 쥐들이 다시 모습을 나타내고, 그와 함께 페스트도 쇠멸해 간다. 이 때 타루와 신부는 병에 걸려 류의 간병도 헛되이 숨을 거둔다. 도시는 다음해 2월 어느 맑게 갠 날 새벽에 드디어 폐쇄된 문을 연다. 사람들은 뿌옇게 솟아오르는 햇살 속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기뻐 어쩔 줄을 모른다. 류는 해방을 축하하는 사람들의 환성을 들으면서 페스트가 상징하는 악은 결코 멸망하지 않고 또다시 어딘가에 행복해 보이는 도시에 불쑥 발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페스트》는 2차 세계대전 때의 카뮈의 체험을 상징하고 있는 작품이다. ‘페스트’란 전쟁을 위시해서 우리를 부정하는 모든 폭력을 의미한다. 이 끔찍한 불가항력 앞에서 인간들은 여러 가지 태도를 취한다. 달아나려는 사람, 절망하는 사람, 남의 죽음을 기뻐하는 사람, 그리고 재해를 정당화하는 사람……카뮈는 이 모든 사람을 이해한다. 그들을 고발하기 전에 이해한다. 그러나 이 무서운 전염병과 그 전염병이 상징하는 인간 부정의 모든 악 앞에서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올바른 태도는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아무리 그 힘이 무서울지라도 끝까지 버텨 보는 것이다.
주요 인물의 하나인 신문기자 랑베르는 취재차 파리에서 오랑에 특파되어 머무는 동안, 페스트가 발생하여 시의 출입이 차단되고 그 곳에서 감금상태가 된다. 파리에는 약혼녀가 기다리고 있다. 처음에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오랑 시를 벗어나려고 애를 쓴다. 즉 부조리한 것의 해소를 갈망한 것이다. 그러나 페스트가 기승을 떠는 앞에서 오랑 시민들이 고통을 겪는 것을 보고 마침내 그는 윤리적 부조리에 직면한다.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려는 욕망과 다른 사람들의 불행에 무관심할 수 없는 인간적 심정의 이율배반에 봉착한다. 인간이 느끼는 유혹은 우리를 거부하는 세계로부터의 도피이며 랑베르의 경우 그것은 오랑 시로부터의 탈출이다. 그것은 마치 형이상학적 부조리에 직면한 의식이 인간의 합리욕을 거부하는 뜻없는 세계로부터 종교적 희망인 탈출의 유혹을 느끼는 것과 흡사하다. 그러나 막상 탈출이 가능하게 되자 랑베르는 그대로 머물러 보건대에 참가할 결심을 한다. 그가 행복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오랑 시로부터의 탈출을 거부하면서 동시에 자살도 거부함으로써 카뮈의 철학적 반항이 이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인생의 부조리성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일 뿐이다. 그 현실에서 한 걸음도 떠나지 않고 모든 비약과 추상을 배격하여 이 신 없는 원죄(原罪)를 살아가려는 반항적 인간상을《페스트》에서 보여 주고 있다.
『전락』은 1956년에 쓴 작품으로, 전직 파리 변호사 출신인 클라망스라는 등장인물을 통해 세계와 타인들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불일치의 증언을 담고 있는 고백체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주인공은 자신(인간)의 이중성과 죄의식의 고뇌 등으로 파멸된 한 영원의 비밀을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드러냄으로써, 그 반전이 주는 자유로움과 해방감의 여정을 예시해 주고 있다. 실제로 일어난 그 얼마 되지 않은 일을 말하고, 실재로 말해진 그 얼마 되지 않은 말을 전달하면서도, 클라망스는 어떤 가슴을 에이는 듯한 비장함에 도달하는데 성공한다. ‘존재 etre’에 가까이 다가가고 기쁨에서 멀어져 가는 데서 유래하는 그 비장함 말이다.『전락』의 가치는 까뮈가 여기서 그의 삶의 어떤 비밀에 가 닿았다는 사실에 연유하는지도 모른다. 양심에 꺼릴 것 하나 없는 저 드높은 순수성과 죄의식의 고뇌 사이에서 찢어지고 있는 한 영원의 비밀 말이다.
소설은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의 술집에서 전직 변호사 클레망스라는 사나이의 회상으로 시작된다. 화자(話者)인 클레망스는 과거 한 여인이 센강에서 투신자살하는 것을 보고도 방관한 이후 자신의 명성과 덕행이 얼마나 기만적이었나를 깨닫고, 세상에서 진정한 결백· 정의 등은 모두 위선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정신적 범죄자라고 말하는 클레망스는 상대방의 위선을 깨닫게 하고 죄인으로서의 연대감을 일으키려고 한다. 인간의 부조리를 직시, 원죄의식을 통한 실존의 철학을 보여 주는 카뮈의 대표작이다.
작품 전개는 시간상 과거와 현재, 공간상 빠리와 암스텔담 사이를 불규칙적으로 왕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미지의 대화자를 향한 주인공 클라망스의 발화행위는 비록 동일인물에 의한 것이라 하더라도, 시간과 공간의 변화에 따라 나타나는 ‘Narration ultérieure’, ‘Narration antérieure’, ‘Narration simultanée’, ‘Narration intercalée’로 차이의 뉘앙스를 보이고 있다. 이는 쥬네트가 『Discours du récit』에서 말한 바와 같이, 1인칭의 대화라 할지라도 그것이 시간과 공간을 달리할 경우 결코 같을 수 없다는 주장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La Chute( 전락)는 크게 두 개의 이야기 구조(Récit Premier & Récit Second)를 띄는 듯하다. 다시 말해서 발화행위 자체의 현재성과 시․F공간상의 차이에 의한 본질적인 허구성 사이에서, 텍스트의 내레이션이 복잡하게 교차하고 있다는 것이다.
종래의 작품 해석이 상당부분 작품 속에 영원히 존재하는 고정된 의미를 찾아내는데 노력했다면, 텍스트의 독서는 작품에 분석적 또는 해석적 공간을 확장하여, 전통적이고 진부한 고정 의미에서 인위적인 동시에 기교적인 방법론을 가능케 하고 있다. 다시 말해 텍스트의 독서는 구태에서 탈피하려는 새로운 책읽기 방법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 자유로움 속에서의 질서가 부여된 구속을 수반한다는 뜻도 되겠다. 끌라망스의 발화행위에서 포착되는 발화습관, 제스쳐, 표정, 순간적 감정 등은 더 이상 고정된 텍스트에 대한 분석 방법에서와 같은 천편일률적인 해석을 무효로 만든다. 그러기에 오늘날의 수많은 문학텍스트론 중 하나에 불과한 쥬네트의 Figure Ⅲ 에 전개된 책읽기는 텍스트에 대한 분석 또는 해석의 지평을 좀 더 넓힐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알베르 카뮈의 <전락>에는 고백하는 남자가 나온다. 그는 자신을 재판관이자 참회자라 부른다. 어떻게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재판관이 자신의 죄악을 참회할 수 있을까? 그의 고백에 따르면 그는 언제나 떳떳한 편에 서 있었다. 그는 장님들이 길을 건널 때 도와주길 좋아했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알려주길 마다하지 않고 적선하기를 좋아했고, 급해 보이는 사람에게 택시를 양보하길 망설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한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는 사실 자신이 남보다 높은 곳에 있지 않고는 도무지 마음이 편치가 않았던 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진정한 명예가 아니라 타인에 대한 우월성이다. 최대 다수의 사람들에게 정의로운 자신을 보여주면서 존경을 끌어내는 것이다.
자살과 가난 같은 것에 관심을 갖긴 했지만 그것은 예의상 혹은 필요에 의해서 그랬던 것이고 실상 가장 자주 도와준 사람들은 바로 그가 속으로 가장 멸시하는 사람들이다. 그는 일생에 걸쳐 엄청난 사랑을 해봤는데 그 대상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었다. 그는 어느 날 자신은 그저 어떤 역할을 연기했다고 고백한다. 능력 있는 사람, 총명한 사람, 도덕적인 사람, 시민 정신이 투철한 사람, 너그럽고 모범적인 사람, 분노할 줄 아는 사람. 그가 새삼스레 이런 고백을 하는 이유는 뭘까? 그건 그가 죽음에 대한 깊은 생각 속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에게까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 남을 이용했습니다, 라고 고백한다.
카뮈는 자신의 소설 <전락>을 이렇게 설명한다. “어디까지가 고백이며 어디까지가 남들에 대한 고발일까? 이 책에서 말을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심판하는 것인가, 그의 시대를 심판하는 것인가?” 자신의 위선에 대한 뜨거운 고백이자 날카로운 고발을 행함으로써 <전락>의 주인공이 진짜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건 부드러운 위로도 격려도 아니었다. 그것은 소설의 끝에 스치듯이 나온다. 카뮈는 무거운 고뇌와 인간에 대한 간절한 우정과 그리움을 담아서 이렇게 말한다. “가령 선생, 예컨대 선생께선 오늘 밤부터 나를 위해서 땅바닥에 누워서 잠을 자게 된다 이런 말입니다.” 그런데 카뮈는 누군가를 위해서 땅바닥에 누워서 잠을 자는 것이 “하얀 눈에 불이 붙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꿈이라고 말했다.
카뮈의 작품을 특징짓는 ‘부조리 문학’이라는 꼬리표는 <전락>에서도 유효하다. 하지만 <이방인>이나 <페스트>와는 몇 가지 점에서 선을 긋고 있다. 우선 이 작품은 불길한 시대 속에 놓인 실존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능동적인 힘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클라망스의 유희에 가까운 언어가 이어지면서 ‘중얼거림’ 같은 자조와 헛된 자부가 넘쳐난다. 기실 자조란 자기 자신을 가해하면서 자기 자신을 벗어나고자 하는 행동이 아니던가. 소설 전체를 통해 클라망스는 정치와 이상, 실존과 구원을 지칠 줄 모르고 이야기하지만, 이는 돌고 도는 이야기처럼 그 끝에서 클라망스 자신으로 돌아간다.
“아마 때때로 나도 인생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척하기도 했을 겁니다. 그러나 이내 그 심각성 자체가 지닌 경박한 면이 눈에 보여서, 그저 할 수 있는 한 내가 맡은 역할을 계속 연출할 뿐이었습니다. 나는 능력 있는 사람, 총명한 사람, 도덕적인 사람, 시민 정신이 투철한, 분개한, 너그러운, 협동적인, 모범적인 사람 등의 역을 연출했어요. 그만 해두죠. 이미 선생께서도 이해하셨겠지만, 요컨대 나는 저기 있으면서도 딴 데 가고 없는 저 네덜란드인들과 같았던 겁니다. 즉 내가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 나는 사실은 거기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말씀입니다.” -91∼92쪽
달리 말하면 소설 <페스트>나 희곡 <정의의 사람들> 등에서와 달리 <전락>에서는 비극적인 상황과 이에 맞서는 인물이 보이지 않고, 비극적인 상황을 피하고자 웃음을 띄우고 호의를 가장하는 인물이 나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의 매력이 클라망스의 다변(多辯), 관계와 의미를 뒤섞으며 실존의 부침을 보여주는 고백들에 있다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가만히 살펴보면 클라망스의 고백들은 거짓과 진실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테면 영광스럽던 삶이 끝났다/ 분노와 몸부림도 끝났다라는 고백(112쪽), 모든 사람이 다 유죄라고 단언할 수 있다(113쪽)/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을 것이다(146쪽)라는 고백 등등. 더욱이 클라망스는 거듭해서 자신의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더욱 더 거짓을 퍼뜨리고 있다.
결론 삼아 이야기하자면 고백이야말로 <전락>이 도달한 주제가 아닐까 싶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의 선택이 ‘후회’가 되고, 자신의 구원이 ‘고통’이 되고, 자신의 실존이 ‘변명’이 되는 상황. 그 상황을 담은 말이 고백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이즈음 산다는 일은 무엇무엇을 지키는 것, 무엇무엇을 나누는 것이기보다는 무엇무엇을 원하는 것, 무엇무엇을 누리는 것일 때가 많아졌다. 그것을 위해 심지어는 사람을 짓밟거나 죽이기까지 한다. 그리고 태연하게 안락한 삶을 살아간다. 가끔 클라망스의 고백이 그 안락한 삶과 겹쳐진다. 거짓 고백과 진짜 고백 말이다.
1942년 (이방인)의 발표 직후에 출간된 ‘시지프의 신화’는 카뮈의 근본사상인 ‘부조리의 철학’이 체계 있게 정리된 철학적 명저이다. ‘현대 작가의 반항’의 저자인 알베레스는 그 책에서 카뮈의 작품을 ‘알제리기(期)’ ‘철학기’ ‘윤리기’로 나누고 있는데, ‘시지프의 신화’는 이른바 ‘철학기’를 대표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전개하고 있는 사상은 ‘알제리기’에 속하는 (결혼)이나 (이방인)의 근저에 깔린 사상을 논리적으로 집약, 전개한 것이면서도 ‘윤리기’에 속하는 (페스트)와 그 밖의 작품을 꿰뚫고 있는 사상으로서 그의 대저 (반항적 인간)까지도 ‘시지프의 신화’의 사상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고 있다.
카뮈가 알제리에서 태어나, 그 청년기의 사상을 북아프리카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키워갔다는 것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눈부신 태양과 바다와 돌, 사막을 가로지르는 바람과 꽃더미를 감지시키는 산문시적인 에세이 (결혼)은 북아프리카의 풍토에서 카뮈가 무엇을 배웠는가를 너무나 잘 말해주고 있거니와, 그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적나라한 자연에의 사랑과 인간의 허위에 대한 반항이라 하겠다. 관능적인 범신론과 무신론적인 스토이즘이라 해도 좋다. 열대의 태양은 인간으로부터 일체의 문명과 도덕을 박탈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벌거숭이 자연, ‘인간 부재의 자연’에 직면케 한다. 거기에는 대지와 ‘결혼’한 인간의 관능적인 도취가 있고, 육체의 축제가 있고 감각의 환희가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자연은 낭만주의의 자연도 아니고, 자연주의자의 자연도 아닌, 밝은 열대의 태양에 비쳐지는 명석한 의식으로 파악된 자연이다. 그 의식은 일체의 인간적 희망을 거부하고, 기성 도덕이나 관념이나 논리에 반항한다. (결혼)에서는 삶의 환희가 타오르고, ‘오해’에서는 희망의 부정이 극점에 까지 치닫는다. 이처럼 사랑과 반항, 생명과 의식, 에피큐리즘과 스토이즘, 타오르는 ‘긍정’과 거센 ‘부정’이 두 가지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로 긴밀하게 일치된다. 이것이 카뮈의 근본 정신이다. 부조리란 인생에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지만, 외견상 이 말은 니힐리즘의 배후에는 생명의 강한 긍정과 지성에의 깊은 신뢰가 도사리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지프의 신화’에서 카뮈가 부조리는 도달점이 아니라, 출발점이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인생을 부조리라고 결론짓는 것이 아니라, 부조리한 인생에 있어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문제 삼고 있다. 이 ‘세계는 그 자체로서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 우리가 이 세계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다. 그리고 부조리란 이 같은 이해를 거절하는 것,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저 명석한 이해에의 열망과의 대결인 것이다. 부조리는 세계와 인간의 쌍방에 의존한다. ‘ ‘인간은 누구나 자기 속에서 행복과 이성을 찾고 싶어한다. 이 인간의 욕구와 세계의 배리적인 침묵과의 대결에서 부조리가 비롯된다.’ (시지프의 신화에서) 인간과 세계, 의식과 현실, 이 두 가지의 긴장된 대립을 파악하는 것, 이것이 카뮈의 부조리의 입장에서 어떻게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이 나올 수 있는가.
예컨대 (페스트)에서 보는 의자 류의 헌신적인 행위나 레지스탕스에서 보는 정의를 위한 투쟁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부조리란 인간의 형이상학적 조건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극복되어야 할 출발점이며, 실천적인 과제이고, 그 과제에 대응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부조리란 부조리에 대한 투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시지프의 신화’에서 보는 희망의 거부는 관념적인 도피에 대한 거부, ‘철학적 자살’에 대한 거부로서 절망에의 동의가 아니다. 부조리의 사상은 니힐리즘이 아니라, 바로 니힐리즘의 거부에 다름이 아니다. 부조리를 결론으로 하여 절망을 긍정하는 니힐리즘은 자살과 살인의 긍정으로 유도할 것이다. 하지만, 부조리는 ‘출발점’으로 하고, ‘방법’으로 삼는 카뮈의 입장은 생명옹호를 위한 태양으로 이끌어간다. 부조리한 인간의 불모성, 내일에 대한 거부, 가치와 합리성에 대한 거부, 양(量)의 윤리학, 이런 것들을 행실적으로 고정시켜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관념적인 도피에 대한 안티테제일 때 비로소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며, ‘양’의 윤리는 그 자체 가장 깊은 ‘질(質)’의 윤리에 불과하며, 희망의 부정이야말로 유일한 희망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