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너 마리아 릴케

Rainer Maria Rilke (1875. 12. 4. ~ 1926. 12. 29.)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는 1875년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그는 하사관에서 장교로 입신하는 게 꿈이었던 아버지와 소녀 취향을 갖고 있던 어머니 사이에서 일곱 살 때까지 여자아이로 길러졌다. 릴케는 1886년 아버지에 의해 육군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참담한 시련의 시기로 묘사되는 이 시절에 릴케는 처음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시들은 주로 감상적이고 미숙한 연애시들이 주종을 이루었다. 릴케의 이러한 경향은 1896년 살로메와의 만남을 통해 크게 선회하게 된다.

특히 두 번에 걸친 러시아 여행과 스위스를 비롯한 이탈리아 각지를 여행하면서 얻은 깊은 정신적 영감을 바탕으로 초기시의 대표작『기도시집』이 완성되었다. 그 밖에도 브릅스베데의 화가촌에서 하인리히 포겔러와의 만남. 1902년 파리 방문을 통한 로댕과의 만남은『형상시집』,『말테의 수기』의 집필 동기가 되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신시집』은 사물시의 결정으로서 로댕과의 만남에서 얻은 조형 예술 세계 체험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릴케는 세기 전환의 격동 속에서 실존의 고뇌를 온몸으로 겪으며 치열한 삶을 문학적 형상으로 승화시켜 ‘현대의 고전’ 반열에 올려놓은 시인이다. 소녀 취향적인 모친은 그에게 여섯 살까지 여자아이의 옷을 입혔고, 부친은 그를 장트[聖] 펠텐 육군유년실과학교에 입학시켰다. 이렇게 그의 어린 시절은 각각 첫딸을 잃은 모친과 장교가 되지 못한 부친의 대리 보상을 위한 제물이 되었다. ‘잃어버린 어린 시절’은 훗날 그의 작품에 중요한 모티프로 나타나게 된다.

릴케는 육군고등실과학교를 중퇴하고 백부의 후원으로 인문고등학교 졸업 시험에 합격한다. 그후 1895년 겨울 학기부터 프라하대학교에서 문학, 역사, 미술, 법학 등을 공부했다. 그는 사관생도 시절부터 부지런히 시를 써서 발표했으며, 대학입시 준비 중에 첫 시집 ≪인생과 노래(LEBEN UND LIEDER)≫(1894)를 출판했다. 그러나 그의 본격적인 문학 수업은 뮌헨대학교로 옮긴 후,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1861~1937)를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릴케보다 14년 연상이었던 루 안드레아스는 릴케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쳐 주고, 두 차례나 러시아 여행에 동행해 톨스토이와의 만남을 주선하는 등, 평생 동안 릴케에게 조언을 해주었다.

그 후 릴케는 북독일의 예술가 마을인 보릅스베데의 풍경 화가들과 교류하면서, 그 결과를 ≪형상시집(BUCH DER BILDER)≫(1902)으로 펴냈다.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 여기서 만난 조각가 클라라를 아내로 맞이했다. 그러나 딸 루트가 출생한 직후 백부의 유산에서 받아 왔던 지원이 갑자기 끊기는 바람에 생존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릴케는 프랑스의 조각가 로댕(1840~1917)에 대한 평전 집필을 청탁받고 파리로 갔는데 릴케의 파리 체험은 두 가지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우선 그는 로댕으로부터 ‘끝없는 작업과 인내’라는 예술가의 자세를 배웠고, 그것을 ‘사물시(DING GEDICHT)’로 구현하려 했다.

이후 릴케는 덧없음과 고립으로 요약되는 삶의 부정적 의미에 시달리면서 ‘정처 없는 떠돌이’처럼 유럽의 전 지역을 돌아다녔다. 한편 그는 ‘눈으로 본 시’가 아닌 ‘마음으로 느낀 시’를 쓸 방법을 찾아 헤맸다. 마침내 릴케는 1922년 초 불과 두 달 사이에 두 개의 장편 연작시 ≪두이노의 비가(DUINESER ELEGIEN)≫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SONETTE AN ORPHEUS)≫를 완성했다.

스위스 체류와 제1차 세계대전의 체험, 아프리카와 에스파냐 등지의 여행은 릴케 말년의 역작인『두이노의 비가』,『오르포이스에게 바치는 소네트』에 녹아들어 죽음으로써 삶을 완성하는 존재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릴케는 유럽의 여러 나라와 러시아, 아프리카, 스페인, 북구 등을 떠돌며 끊임없는 방랑 속에서 살았다. 그는 2천 편이 넘는 시와 단편소설, 희곡을 비롯한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1926년 12월 자신을 찾아온 여인에게 장미꽃을 꺾어 주려다 장미 가시에 찔린 것이 화근이 되어 스위스 발몽에서 5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

신시집 (die Neuen Gedichte)

로댕론

신시집 제2부 (Der neuen Gedichte anderer Teil)

말테의 수기

두이노의 비가 DUINESER ELEGIEN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1910년 발표된 작품으로 덴마크 귀족 출신인 젊은 무명시인 말테가 파리에서 죽음과 불안에 떠는 영락한 생활을 영위하면서 쓴 수기 형태를 취하는 소설이다. 말테는 대도시에 대한 동경심을 품고 파리로 떠났지만 화려한 도시의 외양이 숨기고 있는 불안과 소외의 냄새를 기민하게 알아차린다. 그리고 도시의 압도적인 인상에 맞서며 자신의 체험을 일기로 기록해 나간다. 이 작품은 압축적인 표현과 릴케 고유의 이미지 운용법을 통해, 이후 등장할 모더니즘 이론가들의 이성 비판을 선취한 고전이다.

1902년 릴케가 파리에 첫발을 디딘 것은「로댕 연구」를 써달라는 청탁을 받은 탓이었다. 그러나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이 대도시의 빈곤과 침체에 아연실색했다. 이곳에서 그는 무의미한 것, 타락과 암흑, 그리고 만연해 있는 악을 관찰하고 체험했던 것이다. 릴케는 이러한 체험과 고독한 하숙 생활을 바탕으로『말테의 수기』를 써 내려갔다. 이 작품은 체념 의식과 개개인의 고유한 삶이나 죽음은 아랑곳없고 질보다 양이 판치는 대도시의 양상에 대한 공포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절망의 기록이다.

20세기 초 파리는 문화와 산업의 중심지였으며, 덴마크에서 나고 자란 말테에게 파리는 터무니없이 큰 도시였다. 그는 대도시의 위협적인 인상에 압도되지만 여기에 맞서 파리에서의 생활을 수기로 남긴다. 말테가 묘사하는 도시 체험의 단상은 어떤 동경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곳에서 개인은 도시의 외양에 섞여 들지 못하고, 개인과 개인의 관계는 유기적인 전체에서 떨어져 나간 지 오래이다. 이 도시로부터 버림받고 망각된 자들도 곳곳에서 눈에 띈다. 이곳에서 삶은 규격화되어 있고 여기 사람들은 자신에게 맞는 삶을 걸칠 뿐이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죽음을 의식하며 그 씨앗을 품고 살았던 말테의 유년 시절과는 달리, 지금 여기 사람들은 죽음을 삶의 종결과 시체 처리의 문제로만 받아들인다. 그들에게는 삶이 아니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말테는 이러한 풍경이 낯설고 두렵다. 그러나 생에 매달리는 수고마저도 파리에서는 절망적이다. 말테는 “이곳으로 사람들은 살기 위해 온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이곳에 와서 죽어가는 것 같다.”고 단호하게 쓴다.

말테는 파리에서 체류하는 동안 전체 구조가 변화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따라서 말테 개인의 체험은 현대 공간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전형적인 삶이다. 현대 세계에서는 대상이 말을 걸어 주체의 위치를 위협하며 존재와 사유를 물화시킨다. 릴케는 이성 만능주의가 위협하는 삶과 현상을 감지하고 불안에 몸서리쳤다. 그는 루 살로메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모든 것이 변화되고 나의 감각으로부터 떨어져 나갑니다. 모든 것이 친숙하고 밀접하고 의미를 갖고 있었던 세계로부터 나는 쫓겨나서 알 수도 없고, 이름 모를 불안한 세계로 빠져든 느낌이랍니다. 난 마치 모든 사람에게 낯선 이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마치 이국에서 죽은 사람처럼요. 홀로 떨어진 채, 잉여의 존재가 된 채, 다른 맥락 속 파편에 불과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끝내 굴복하여 허물어져서 내던져진다. 말테는 그들이 날아오르는 듯한 몸짓으로 이 도시의 모순에 쓰러지는 모습을 보며 더할 수 없이 끔찍해한다. 당혹스러운 감정과 위기의 불안을 극복하고 자기 존엄을 지키기 위해 말테가 선택한 방법은, 가끔 혹은 자주 유년 시절을 회상하는 것이다. 덴마크에서 보낸 유년 시절은 자본주의가 삶과 죽음을 대량생산 하기 이전에 시대로, 개개인이 고유하고 관계들은 유기적이며 모든 것이 익숙했던 위안의 시절이다. 하지만 유년 시절의 기억을 불러들이며 또 다른 것을 깨닫는다. 말테가 파리에 와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여겼던 것이, 유년기의 인식했던 것들이라는 것.

이를테면 말테는 어린 시절에 거울을 보다가 사물과 자신의 관계가 역전되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때 말테는 거울에 비친 가상을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해 두려움에 떨었다. “거울은 나로 하여금 고개를 치켜들게 했으며 내게 하나의 상을 보여주었다, 아니 하나의 현실을, 낯설고 알 수 없는 현실을 보여주었다. 나는 나의 뜻과 상관없이 이 현실 속에 흠뻑 빠졌다. 이제는 거울이 나보다 힘이 센 존재가 되었고 나는 거울이 된다. 그래, 나는 정신을 잃었고 존재하지 않았다.”(106) 말테는 사물의 가상(시뮬라시옹)이 주체를 압도하고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 공포는 예상을 무너뜨리는 경험에서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주체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도.

다만 의식적으로 기억하고 있지 못했을 뿐이다. 그리하여 다 자란 말테는 이성 만능주의가 내세웠던 주체를 위협하는 것은 이성 자신의 오기임을 깨닫는다. 더불어 말테가 자신의 인식 세계를 비로소 통합할 수 있었던 것은, 변화가 한창인 세계 속에 머물면서부터라는 것도 언급해 둔다.

어떤 변화는 긍정적인 의미의 발전을 가져온다. 말테는 이성적이며 인과적인 기존의 글쓰기 방식과는 다른 글쓰기를 하고자 한다. 말테는 어린 시절 읽었던 책을 기억하는데, 이때 언급되는 책은 표면적인 사실에 불과한 것을 진실인양 ‘객관적으로’ 서술한 역사책이다. 그가 역사책을 기억하는 방식은 다른 글쓰기의 기반이 된다. 말테는 “저들”이 기록한 사실 관계에는 관심이 없으며, 주로 해당 인물의 기분이나 절망에 대해 상상한다. 독자로서 책을 기억한 끝에 그는 역사책으로 상징되는 것과는 다른 글쓰기와 해석을 선언한다. “내가 쓴 모든 시는 다른 방식으로 생겨났다.” 그리고 “이런 뒤숭숭한 생각을 해본 사람이라면 그게 누구든 간에 과거에 해내지 못했던 것을 어떻게든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의 글쓰기는 이전의 ‘균형 잡힌’ 서사와는 거리가 멀다. 이 책 또한 모두 일흔한 개의 일화가 비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매끄러운 서사와는 거리가 먼 서술 방식 때문에『말테의 수기』는 종종 파편적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릴케의 편집 방식은 매우 섬세하고 치밀하다. 독자들은 수기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일화 사이의 밀접한 관계가 한눈에 들어올 것이다. 머릿속에서 현재와 과거의 경계를 넘나들며 말테의 삶을 재구성하고, 실재 기억과 허구적 이야기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는 상상의 즐거움을 누릴 수도 있다. 그 여운의 끝에 독자들은 고정된 사유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를 바라보는 릴케의 시선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소설 속의 주인공 말테는 덴마크 귀족 출신의 한 무명작가로 28세이다. 그는 파리의 거리와 사람들을 관찰하고 자기의 수기 첫째 줄에 이렇게 써넣는다. “그래, 그런가 보다. 여기에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은 살기 위해서인가보다. 그러나 나는 차라리 여기서는 무엇이든 모두가 죽어간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파리의 우울, 불안, 공포가 주인공 말테의 심신을 피로하게 했고, 그를 죽음으로 이끌어간다. 그러나 그는 죽음이 가까워옴에 따라 오히려 삶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된다.

이것은 한 영혼의 전면(全面)을 묘사한 희대의 명작으로 파리의 견문, 감상기, 메모와 추억, 그리고 일기 형식이 이 소설의 특색이기도 하다. 즉 <말테의 수기>는 54개의 소단원으로 이루어진 수기인데도 전체적으로는 하나의 통일된 견해, 인생과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 시종 유지된다. 내용적으로 주인공 말테의 자기 존재의 확인을 위한 고민의 기록이며, 문학 장르로는 독일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작이다.

릴케는 <햄릿>이라던가 <파우스트>, <신곡>등의 명작에 끌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무명작가의 작품이나,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서 미지의 풍요함을 발견해 내는 남다른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자기 내면의 법칙에 따라 살았기 때문에 일체의 획일주의를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말테의 수기>를 발표한 이후, 생애를 마칠 때까지 10년이나 걸려서 완성한 대작 <두이노의 비가>와 <오르페우스에게 부치는 소네트>는 인간 존재의 긍정성을 희구하는 예술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들은 프랑스의 보들레르 이후 내면화의 길을 걸어온 시구시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릴케는 말년에는 스위스의 주네브 호수 북쪽 기슭에 있은 몬토르 지방에서 조용한 시간을 즐기면서 프랑스어로 시를 쓰고 발레리의 작품을 번역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이집트로부터 자기를 찾아온 니메트 엘리베이 부인을 위해 장미꽃을 꺾다가 그 가시에 찔린 것이 화근이 되어 패혈증으로 고생하게 되었다. 그는 결국 백혈병으로 스위스 제네바의 발몽 병원에 입원한 뒤 그곳에서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프랑스의 시인 폴 발레리는 그의 죽음에 즈음하여 이렇게 말했다. “소중한 사람 릴케, 나는 그의 마음속에 깃들인 이 세상에서 가장 섬세하고 재치 있는 인간성을 보았고 또 사랑했다. 그는 드물게 온갖 정신적 불안과 비밀 대문에 삶을 가장 고민한 한 인간이었다.

릴케는 독일의 작가이기 이전에 유럽의 작가이다. 그가 살아온 과정이 이 점을 분명히 해준다. 그는 1875년 프라하에서 태어나 정상적인 시민으로 길들여지지 못하고 스물두 살이 되던 해에 베를린으로 건너갔다. 다음해에는 이탈리아를, 그리고 그 다음해에는 러시아를 여행하고 1900년에 잠시 북부 독일에 머무르다가 클라라 베스토프와 결혼했다. 하지만 곧 파리로 와서 로댕과 앙드레 지드를 사귀었다. 그는 이듬해에는 이탈리아로, 그 이듬해에는 스웨덴으로, 유럽 각지를 두루 방랑하다 “말테의 수기 Die Aufzeichnungen des Malte”이 나온 1910년에 프랑스 체류를 마감하고 나중에는 북아프리카까지 두루 여행했다.

더구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독일땅에 발을 들여놓지 않고 방황하다가 1921년부터 친구 베르너 라인하르트가 제공한 뮈조트 성을 안식처로 삼아 고독하게 살았다. 그러나 유약했던 그는 채 50세도 되기 전에 요양소에 입원해야 했으며, 1926년 51세의 나이로 우리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듯이 시인다운 죽음을 맞이했다. 장미를 꺾다가 가시에 찔린 것이 패혈증으로 번졌던 것이다.

그의 보헤미안 기질은 그로 하여금 유럽 전역의 예술가들을 사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20세기의 유명한 예술가들 치고 릴케와 친분을 맺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미 언급했던 로댕을 비롯하여 앙드레 지드, 안드레아스 루 살로메, 톨스토이, 파스테르나크, 폴 발레리 등이 여기 속한다. 이러한 교류는 릴케의 작품 세계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말테의 수기”를 예로 들면, 조형예술의 주요 인식 수단인 “보는 것”이 강조되고 많은 예술가와 그들의 작품이 암시적으로 나타난다. 방랑벽 자체도 작품에 반영되어서 “말테의 수기”는 파리를 무대로 삼고 있으며, 주인공 말테는 예민한 감성으로 파리 시를 헤매 다닌다.

<말테의 수기>를 읽다 보면 이 작품이 “일기”라는 사실을 잊기 쉽다. 소설의 도입부를 제외하고는 날짜가 명시되어 있지 않은 점도 여기에 한몫을 한다. 일기는 1인칭 소설과는 또 달라서 주인공의 의식 상태가 고스란히 드러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읽는 사람에게도 왠지 모를 호기심을 유발한다. 더욱이 이 작품의 경우에는 일기만이 표현할 수 있는 서술방식이 작품의 주제와 멋들어지게 어우러진다. 일기를 쓸 때에는 사건에 대한 보고보다 그것을 본 자신의 느낌이 더 중요하게 다루어지다 보니 완전한 문장보다는 동사가 생략되는 간결체가 많이 나타나고 비약이 가능해진다. 또한 일기를 쓰고 있는 사람의 심적 상태가 민감하게 반영되어 문장의 호흡이 가빠지거나 느슨해지는 것이 매우 잘 느껴진다. 더욱이 소설가라기보다는 시인인,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시각적이어서 독일 상징주의의 대표자라고 칭해지는 릴케는, 논리적이거나 사실적인 서술 대신에 말테가 “본” 것이 남긴 “인상”을 이미지화해서 “연상”이 소설을 이끌어 가게끔 한다.

이러한 서술방식은 말테가 느끼는 낯설음과 불안감을 표현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적격이다. “현대”가 가장 세련되게 구현된 20세기 초의 파리는 이방인 말테에게 실존적인 고뇌의 시간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현대소설의 주된 흐름이 그렇듯이 줄거리의 전개는 이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한다. 시간상의 배열도 고려되지 않고 있다. 다만 소설을 쓰는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면서 유년시절의 추억과 에피소드들, 그리고 대도시 파리에서의 체험들이 나열된다. 그것을 토대로 독자는 주인공 말테의 삶을 재구성해 볼 따름이다.

덴마크 귀족 출신이 스물여덟 살의 청년 말테는 파리에 머무르면서, 낮이면 시내를 방황하고 밤이면 글을 쓰는 생활을 한다. 그의 유년시절은 할아버지 브리게 시종관의 죽음. 외할아버지 댁에서의 알 수 없는 체험. 그리고 젊은 나이에 죽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들로 점철되어 있다. 또한 브라에 백작가의 딸 아벨로네를 사랑하게 된 과정이 릴케 특유의 서정적인 필체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파리를 방황하는 현재의 말테는 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온 이방인이다. 그는 자기 방안의 불빛에서조차 위안을 받지 못하는, 세계로부터 버림받은 자이다. 그가 파리에서 체험하게 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비참한 모습으로 신문을 파는 장님과 간이식당에서 그대로 굳어 버린 사람과 병원이 넘치도록 병들고 죽어 가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말테에게도 도피처가 있었다. 도서관에 앉아서 어느 작가의 글을 읽는 것은 그에게 더할 나위 없이 축복 받은 일이다. 그는 한 중년 남자가 고향 마을의 어느 소녀를 사랑하게 되어 사랑의 여류 시인 사포를 이해하게 되는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한다. 그리고 말테는 버림받은 자의 삶과 표정에서 점점 신의 존재를 예감하게 된다. 후반부로 가면서 말테의 수기는 역사적인 인물의 종말을 소재로 삼고 있다. 어렸을 적 의미 있게 읽었던 초록색 표지의 책에 나오는 두 인물의 이야기가 기억난 것이다.

가짜 황제 그리샤와 용장 카알의 죽음은 말테에게 각각 다른 형태의 죽음을 보여준다. 죽음은 이 작품이 변주하고 있는 주제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 말테에게 파리는 살기 위한 도시가 아니라 죽음을 위한 도시이다. 그는 거리에서, 차 속에서, 그리고 공원에서 죽음을 목격한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죽음을 돌이켜보면서 죽음은 삶 속에 내재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고유한 삶만큼이나 고유한 죽음이 사라져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 두 역사적 인물의 죽음이 되살아난 것의, 그들만큼은 고유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말테의 인식 때문이다.

말테가 느끼는 실존의 위기는 불안과 공포, 고독으로 나타난다. 그는 파리에 머무르면서 자신이 내적으로 변화해감을 통찰하고, 새로이 변한 자신에게는 한 명의 지인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편지를 쓸 사람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에게 있어 친숙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방안의 사물들마저 그를 낯선 존재로 대한다. 그는 파리의 골목골목에서 소외를 체험한다. 밤이면 온갖 불안에 휩싸인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감수성은 더욱 예민해져서 세상을 “보는 법”을 익히게 된다.

이 고독한 방랑자 말테의 행로를 우화적으로 보여 주는 것은 수기의 마지막 부분 탕아의 이야기이다. 성서적 소재를 달리 해석한 이 이야기는 말테가 걸어온 길, 앞으로 걸어갈 길을 축약적으로 보여 준다. 즉 탕아는 가족들의 사랑을 피해 집을 나온다. 그가 원하는 것은 “마음의 내적 무관심”이다. 고독만을 사랑하며 “사랑 받는 이”가 되지 않으려 했던 그는 마침내 신에 대한 사랑을 갈구하기에 이른다. 물론 그것은 대답 없는 사랑이지만 이를 통해 그 자신은 “사랑하는 이”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제 탕아는 집에 돌아올 수 있게 된 것이다.

 1902년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은 한 시인 지망생이 자신의 습작시들과 함께 속내를 털어놓는 한 통의 편지를 28세의 시인 릴케에게 보낸다. 그렇게 시작된 두 사람 간의 편지는 1908년까지 지속되었다. 릴케 사후인 1929년, 프란츠 크사버 카푸스는 릴케로부터 받은 편지들 가운데 10통을 골라 책으로 묶어 펴냈다. 이 편지들에서 드러나는 릴케는 한 선배 시인으로서의 조언자이지만 또한 자신의 문학, 시에 대하여 진솔하게 고백하는 친구이기도 하다. 릴케는 ‘젊음’과 ‘시’라는 주제와 더불어 사랑과 성, 고독, 죽음, 예술, 나아가 인간의 존재 이유에 대한 문제들을 개진하고 있다.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릴케 자신이 “편지를 가장 근사하고 가장 효과적인 교제 수단으로 여기는 구시대적인 사람” 중의 하나라고 고백한다. 그렇듯이 릴케의 서간문에는 편지의 사교적 기능에 도움이 되는 또 다른 요소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편지라는 표현수단은 그의 성향과 내향적인 세계관에 잘 들어맞았고, 고독한 개인인 그에게 인간적인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편지는 그가 ‘일상적인 일’을 연습하기 위해 파리에서 지내던 시절에 예술가로서의 존재를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또한 1912년부터 1922년까지 오랜 세월 침묵을 지킬 때 그에게 마음의 위안이 되기도 했다.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는 릴케를 대선배로 흠모하고 있던 프란츠 크사버 카푸스(Franz Xaver Kappus, 1883∼1966)가 릴케와 주고받은 편지들이다. 즉 카푸스가 20년 동안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가 릴케가 죽은 후 바이마르에 설립된 릴케 문서박물관에 기증한 것을 1929년 인젤 출판사에서 출판한 것이다. 생전에 1만 통이 넘는 편지를 쓴 릴케는 스스로 ‘자기 본성의 풍부한 수확’을 편지에 담았다는 고백에 덧붙여 자기가 쓴 모든 편지의 출판은 인젤 출판사의 제안에 따라 수신인 마음대로 결정해도 좋다는 유언을 남겼다.

인젤 출판사는 이 유언에 따라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출간했다. 독자들이 좋은 호응을 보이자 곧이어 릴케가 1919∼1924년 사이에 리자 하이제에게 보낸 편지를 묶어서 인젤 문고로 출간했다. 릴케는 통신 기술이 발달해서 빠른 의사소통이 가능해진 20세기에도 18, 19세기에 만개했던 ‘느린’ 소통 수단인 편지로 수많은 사람들과 내밀한 교류를 했다.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는 카푸스 자신이 서문에서 밝혔듯이, 적성에 맞지 않은 진로를 두고 고민하는 후배에게 선배로서 성심성의를 다해 조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카푸스에게 첫 답장을 쓰던 당시 릴케 자신이 그의 인생과 문학에서 중요한 전환기를 맞고 있었기 때문에 그 내용은 단순한 조언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거기에는 릴케 자신의 새로운 인생관과 문학론에 대한 모색 과정의 고백도 들어 있다. 고독과 성숙과 사랑, 이 세 가지 의미의 긴밀한 연관 관계야말로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릴케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떠받치는 중심 주제이다. 고독은 내면 성숙을 위한 집중의 순간이고, 사랑은 내면 확장의 계기이므로, 서로 상대방의 고독을 지켜 주는 사랑을 통해 자연을 포함한 세계 전체와 내적으로 소통하는 창조적 인간, 그것이 릴케가 카푸스에게 권하고 스스로도 추구한 목표였던 것이다.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는 ‘시인과 젊은 여성’의 관계에서 흔히 추측할 수 있는 로맨틱한 꿈과 연애 감정 교환의 기록물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혼란한 역사의 격동기에 극심한 궁핍 속에서도 어떻게든 삶의 한 귀퉁이를 지탱해 보려고 애쓰던 한 여인에게 보내는 시인의 위문편지일 뿐만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며 삶의 절망적 의미에 공감하는 고독한 자의 동지적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번역은 호르스트 날레브스키(Horst Nalewski)가 인젤(Insel) 출판사에서 2003년에 펴낸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여성과의 서신 교환(Rainer Maria Rilke. Briefwechsel mit einer jungen Frau)≫ 중에서 릴케의 편지를 옮긴 것이며, 시가 첨부된 릴케의 마지막 편지는 이 판본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당신을 위로하려는 이 사람이 때때로 당신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 단순하고 조용한 말이나 하면서 아무런 어려움 없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의 삶에도 많은 고생과 슬픔이 있으며 당신의 삶보다도 훨씬 뒤처져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말을 찾아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생과 슬픔’은 바로 생계에 위협을 느낀 릴케가 막 첫돌이 지난 딸을 장모에게 맡기고, 아내와도 별거하며 원고료를 위해 ≪로댕 평전≫을 집필하며 파리에 머무는 자신의 상황을 투영한 것이다. 그가 고독을 강조하고 글쓰기를 내적 필연성에서 찾아낼 것을 권유하는 것도 상대방만을 위한 충고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존 조건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의미도 있었다. 그 내용이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도 강한 호소력을 지닌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도 삶과 예술에 대한 진지하고 엄격한 자세라고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 편지에서 릴케는 예술 작품에 대한 비평의 한계를 지적한다. 모든 진정한 예술 작품은 비평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차원에서 고유한 존재의 법칙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오직 사랑하는 마음만이 그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어쩌면 릴케를 예술지상주의자로 보이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예술과 인생의 필연적 관계를 강조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릴케 자신이 카푸스의 습작에 대한 직접적인 평가를 유보한다고 하면서도 부족한 점을 짚고 넘어가는 것도 바로 그런 필연성에 기준을 두고 있다. 또한 그런 지적을 통해 시의 성공 여부를 외부의 평가에서 찾으려는 카푸스의 태도를 교정하려는 데에 그 진정한 의도가 있다.

여기에는 물론 그 자신 아직 미숙했을 때 프라하의 좁은 문단에서 마구 작품을 발표했던 과거에 대한 반성의 뜻도 숨어 있다. 이 편지를 쓸 무렵 릴케는 이미 ≪로댕 평전≫을 발표했으며, 로댕에게서 배운 ‘끝없는 작업과 인내’라는 자세와 관련해서, 시는 단순한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체험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외부의 평가를 기대하지 말고 자기 자신의 내면으로 눈길을 돌려야 한다는 릴케의 입장은 각자의 고유한 삶에 대한 무한한 긍정과 기대에서 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인습적 통념을 떠나 각자의 내면적 필연성을 삶의 지표로 삼으라는 요청으로 나아간다. 고독은 그런 필연성에 도달하기 위한 집중과 인내의 과정이며, 또한 이제까지 체험해 보지 못한 깨달음을 통해 새로운 경지로 나아가는 변용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고독한 인간’은 실존의 근본조건을 자신의 내면에서 성찰하고, 어떤 어려움이 닥쳤을 때도 그 해결을 인습이나 타인의 견해에 의존하지 않는다. 또한 그는 무한히 열려 있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으로 꿋꿋하게 버티면서 고유한 삶의 근거를 스스로 찾아나가는 능동적 인간이다.

모든 문제를 가볍게 넘기려 하지 말고, 어려운 상황을 끝까지 참고 견디라는 릴케의 요청은 결국 삶의 모든 부정적 조건을 받아들이는 운명애(amor fati)로 이어지며, 그것은 거의 20년 후에 완성될 그의 ≪두이노의 비가≫에서 죽음도 삶의 일부로 인식하는 현세 긍정의 대주제로 나타난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것은 ‘미래의 신’과 ‘외로운 아이’의 관계에 대해 릴케가 독특한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은 인간의 손쉬운 의지처가 아니며, 오히려 고독 속에서 이루어지는 무수한 내면의 작업을 통하여 미래에 완성시켜야 할 최후의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어른들의 세계에 끼지 못하고 낯선 사물에 둘러싸여 있는 어린아이야말로 “슬프고도 행복한” 내면의 작업을 통하여 미래의 신을 짓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릴케 자신의 ‘잃어버린 어린 시절’에 대한 체험이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되고 있음을 보는 한편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워즈워스의 역설적 시어가 릴케의 문맥에서 다시 그 진실성을 드러내는 매우 인상적인 경우를 본다.

세계와 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어린아이는 릴케가 제시하는 새로운 인간상의 기준이 되는데, 그 새로운 인간은 바로 내면의 성숙을 추구하는 모성적 인간이다. 릴케는 처녀의 그리움으로, 어머니의 헌신으로, 그리고 할머니의 추억으로 나타나는 모성이 창조적인 남성의 내면에도 들어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바로 이런 내면성에서 서로 다르지 않은 남녀관계가 오랜 사회적 통념에 의해 왜곡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이제는 한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남성이냐, 여성이냐’에서 ‘모성적이냐, 아니냐’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기준에서 볼 때 남녀 간의 사랑과 성에 대한 관념도 수정이 불가피하다.

릴케는 육체적인 쾌락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순수성은 인정하되, 다만 도취와 흥분을 위주로 하는 남성적 욕구 충족, 또는 심심풀이를 위한 도구로 오용되는 것을 경계한다. 그는 순수한 육체적 쾌락이 “정점을 향한 집중”을 위한 과정이 되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한다. 모름지기 사랑하는 두 남녀는 그 정점에서 각자 내면의 확장을 경험해야 하며, 그것이야말로 창조적이고 모성적인 사랑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두 사람의 고독을 서로 보호하고, 경계를 짓고, 환영하는 그런 사랑”이 필요하다고 릴케는 강조한다. 여기서 ‘도취에 의한 남녀의 합일’을 꿈꾸었던 로만주의자들과 릴케의 차이점이 드러난다. 릴케에게 사랑은 세계 전체와 내면적으로 소통하기 위한 하나의 가능성일 뿐, 그 자체로서는 그야말로 허무한 꿈이라는 것이다.

릴케는 ≪두이노의 비가≫에서 ‘서로 안에 만족한’ 연인들의 덧없음을 지적하며, 그들의 입맞춤을 ‘서로의 갈증을 풀기 위해 입에 댄 음료수’에 비유하여 상대방의 욕구 충족 수단으로 전락한 그들의 허망한 관계를 신랄하게 풍자한다. 릴케가 말하고자 하는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두 고독한 인간이 각자 내면 확장의 계기를 맞이하게 되는 관계다. 물론 그런 사랑은 어려운 과제이므로, 인내심이 없는 젊은 사람들에겐 아직 진정한 사랑을 할 만한 능력이 없지만, 어려운 만큼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고독과 성숙과 사랑, 이 세 가지 의미의 긴밀한 연관 관계야말로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릴케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떠받치는 중심 주제다. 고독은 내면 성숙을 위한 집중의 순간이고, 사랑은 내면 확장의 계기이므로, 서로 상대방의 고독을 지켜주는 사랑을 통하여 자연을 포함한 세계 전체와 내적으로 소통하는 창조적 인간, 그것이 릴케가 카푸스에게 권하고 스스로도 추구한 목표였던 것이다.

릴케의 이름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자면 그는 탄생 직후 가톨릭 영세와 함께 ‘르네 (카를 빌헬름 요한 요제프) 마리아’라는 긴 세례명을 받았다. 그 가운데 여자 이름 ‘마리아’는 릴케가 태어난 시각이 아기 예수 탄생 시각과 일치한다고 생각한 그의 모친이 붙여준 것으로, 성모 마리아를 닮고 싶은 그녀의 허영심을 투영한다. 그리고 르네(René)라는 본명을 라이너로 바꿔준 사람은 루였다. 체코식 이름은 촌스러워서 작품 활동에 별로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한 그녀가 도이칠란트식 이름으로 고쳐준 것이었다. 그러나 릴케의 시집을 본 호라체크 사관학교 교목은 르네라는 15년 전 제자의 본명을 기억해 냈다고 한다.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는 ‘시인과 젊은 여성’의 관계에서 흔히 추측할 수 있는 로맨틱한 꿈과 연애 감정 교환의 기록물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혼란한 역사의 격동기에 극심한 궁핍 속에서도 어떻게든 삶의 한 귀퉁이를 지탱해 보려고 애쓰던 한 여인에게 보내는 시인의 위문편지일 뿐만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며 삶의 절망적 의미에 공감하는 고독한 자의 동지적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릴케에게 첫 편지를 쓸 무렵 리자 하이제는 남편에게 버림받고 두 살짜리 아들과 함께 나날의 끼니를 걱정하며 사는 스물여섯 살의 여인이었다. 피아노를 공부하는 꿈 많은 소녀였던 그녀는 스무 살 되던 해 엄격한 부친에게 자립 의사를 거절당하고 매까지 맞자 가출해서, 연인인 미술학도 빌헬름 하이제에게 간다. 음악과 미술을 사랑하며 니체, 메테르링크, 입센의 작품 등을 즐겨 읽는 예술가 한 쌍은 결국 혼인을 맺기에 이른다. 부친이 살림집까지 마련해 주었으나 워낙 어려운 세월이었던지라 몹시 형편이 궁색했고, 일거리를 찾아 나선 남편이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았던 이 혼인은 3년 만에 파탄이 이른다. 무책임한 남편에게 버림받은 리자는 어린 아들의 양육을 혼자 맡게 되었지만 모든 것을 감수하고 자식의 장래를 위해 남편의 성은 유지하기로 한다.

이렇게 고달픈 상황에서 리자 하이제는 당시 출간된 릴케의 ≪형상시집(Buch der Bilder)≫을 접하고 크게 위안을 받았다. 그녀의 첫 편지는 그 위안에 대한 조심스러운 고마움의 표시였다.

“저는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선생님의 시들이 지닌 음악에 만족하는 것이 좋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시편들 안에는 쇼팽의 야상곡이 지니는 달콤함과 베토벤의 라르고 악장이 지니는 억제된 힘이 울리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시편들은 마치 잃어버렸던 무언가를 다시 찾은 것처럼 저를 감동시킵니다. 풀 수 없는 의문과 불확실한 대답이 마음을 완전히 달래지는 못할지라도, 선생님의 예술이 주는 순수한 도움 덕분에 저와 어린 자식만이 함께 살아가는 그 깊은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아주 대단한 것입니다. 선생님의 시편들이 말하고 있는 그 ‘경험들’, 그리고 저의 가슴이 기꺼이 받아들이며, 만족할 만큼 큰 위안을 주는 그 경험들에 대해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릴케는 이렇게 조심스러운 감사의 편지를 예사롭게 받아들이지 않고 길고 상세한 답장을 보냈다. 그는 스스로 그 이유를 리자 하이제의 편지에서 느낀 개인적인 신뢰와 호소력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사실 “깊은 고독” 속에서 “어린 자식”을 데리고 혼자 사는 여인의 처지, 그리고 자신의 시구에서 쇼팽과 베토벤의 음악이 지니는 울림을 읽어낼 줄 아는 여인의 감수성은 릴케의 꾸준한 시적 관심과 일치하는 면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 편지를 받을 당시 릴케는 스위스의 하숙집에서 어느 가문의 연대기를 들춰보고, 그 연대기가 그 가문의 여성이나 어머니들, 또는 어린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오직 유명해진 남성들의 이야기만 기록하는 것을 보고 깊이 실망하고 있었다. 그런 참에 리자 하이제는 또 다시 ‘이해되지 못한 존재’, ‘잊혀지고 버려진 존재’로서의 여성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그의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1919년 7월에 시작된 릴케와 리자 하이제 사이의 편지 교환은 릴케의 1924년 5월 7일자 마지막 편지까지 드문드문 계속되었다. 이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독일제국이 멸망하고 혁명의 소용돌이를 거쳐 바이마르 공화국이 겨우 탄생했다. 그러나 패전국으로서 막대한 배상 책임을 안고 극심한 궁핍과 혼란에 빠져 있던 시기였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리자 하이제는 몇몇 여인들과 힘을 합쳐 조그만 땅을 얻어 경작해 보려고 갖은 고생을 했다. 하지만 땅이 척박해서 생계유지에 도움이 안 될 정도로 소출이 형편없었고, 그나마 얼마 가지 않아 지주에게 그 땅마저 다시 내주고 쫓겨나게 되었으니, 그녀가 겪었을 생존의 불안과 고난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릴케는 곤경에 처해 있는 리자 하이제를 매우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며, 그녀가 끝끝내 삶의 의욕을 잃지 않도록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가 마지막 편지에 첨부한 한 편의 시는 급하게 흘러가는 시냇가에 서 있는 한 송이 꽃을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역경에 시달리는 리자 하이제의 모습을 비유한 것이며, 그 시내의 급류가 처음부터 꽃을 괴롭힐 의도가 없었음을 밝힘으로써 그녀 또한 역경을 원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했다.

리자 하이제는 릴케 사후에 그에게서 받은 편지를 ≪젊은 여성에게 보내는 편지≫(1930)로 펴낸 데 이어, ≪라이너 마리아 릴케에게 보내는 나의 편지≫(1934)도 출간해서 세인의 주목을 끌었다. 덕분에 그녀는 부유한 유태계 미국 가문 출신의 한 독지가의 초청을 받아 스위스 루가노의 성에 머물며, 아름다운 남국의 자연과 문화 속에서 허구적인 편지 모음집을 쓸 수 있었다. 이것은 나중에 ≪샘물≫(1950)이라는 제목으로 라이프치히에서 발간되었다.

리자 하이제는 그녀가 증오했던 히틀러의 전쟁에서 살아남았고 홀아비가 된 부친의 살림을 보살폈으며 포로수용소에서 돌아온 아들도 만났다. 그러나 그 후 오랫동안 우울증에 시달리던 그녀는 몇 차례 자살 시도 끝에 1969년 4월 17일 라벤스부르크에서 76세의 생을 스스로 마감했다. 다음과 같은 허구의 편지 한 구절은 그녀가 얼마나 릴케의 생각과 문학에 심취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아하, 시인은 옳다. 힘들게 보낸 현존재에 대한 보상으로 사랑을 삶의 맨 앞이 아니라 맨 끝에 놓아달라고 신에게 빌었으니. 정녕 사랑은 전적으로 젊음의 특권이 아니다. 사랑은 감정 이상이기에. 사랑 안에 그리도 많은 것들이 의지와, 이성과 인격의 아래에 있다. 참되게 사랑할 수 있기 위해서는 삶의 상당 부분을 겪어봐야 하고, 경험이 있어야 하며, 곤경과 충격, 실패와 성공, 그리고 불안을 알아야 한다. 오직 이 점에서 나는 그대보다 우월한 것이다. 그대가 전혀 알지 못하는 이 경험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