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바타 야스나리
Kawabata Yasnari (1899. 6. 11. ~ 1972. 4. 16.)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는 1899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와 조부모, 하나뿐인 누이와 사별했다. 사별한 혈육을 추모하고 외롭고 허무한 인생을 견뎌내는 방법으로 문학을 선택한다. 동경대 국문학과 졸업 후 신진작가 약 20명과 함께 「문예시대」를 창간한다. 직접 창간사를 썼던「문예시대」는 일본문학계에 ‘신감각파’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가 된다. 그러나 신감각파 문학은 1927년 일원이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돌연한 자살로 흐지부지 끝을 맺는다. 다행하게도 이 무렵부터 그의 문학은 독자적인 미적 세계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설국』에 이르러 일본의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자리매김한다.
작가 자신이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으로 꼽았던 『설국』은 그다지 길지 않은 중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기고에서 완성까지 무려 13년의 세월이 걸렸다. 발표 도중 「문예간담회 상」을 받았다. 시작은 1935년 「문예춘추」 1월호였고, 끝은 1947년 「소설신조」 10월호였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196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작가로서 영예의 절정에 이른 시기이다. 몇 년 뒤인 1972년 4월 16일 그는 자살로서 돌연 생을 마감한다. 제자인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가 자결한 뒤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죽음이다. 그의 자살에의 이유에 대해 특별하게 알려진 이유는 없다. 그가 자살할 당시 책상에는 쓰다 중단한 원고와 뚜껑이 열린 만년필이 놓여 있었을 뿐이다.
소년시절의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중학교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쓰던 후배와 특별한 관계가 된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후에 소설 少年(1948~1949)에서 그리고 있다. 旧制茨木중학교를 졸업하고 문학에 대한 뜻을 품고 상경하여 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이때의 외로움을 문학에 몰두하는 것으로 달래고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으로 마음의 위안을 삼았던 것 같다. 또한 육친과의 가혹한 인연이란 운명은 그의 문학에 짙은 영향을 주었다.
1924년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한 뒤 반(半)자전적인 작품 〈이즈의 무희 伊豆の踊子〉(1926)로 문단에 발을 들여놓는다. 이 작품은 작가인 요코미쓰 리이치[橫光利一]와 함께 창간한 잡지 〈분게이지다이 文藝時代〉에 실렸는데, 이 잡지는 일찍이 속했던 신감각파(新感覺派)의 기관지가 되었다. 신감각파의 특징으로는 전통적인 사소설의 리얼리즘에 대한 부정 언어표현의 독립성 강조 근대의 상황・감각・의식을 기반으로 주관적 파악 지적으로 재구성한 신현실을 감각적으로 치환・창조하는 작풍 등을 들 수 있다. 이 문학 유파의 미학은 대부분 다다이즘· 큐비즘· 표현주의 같은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프랑스 문예사조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러한 사조들이 가와바타의 작품에 미친 영향은 갑작스런 장면 전환, 조화되지 않는 인상들과 뒤섞여 자주 놀라움을 주는 이미지, 아름다움과 추함이 동시에 나타나는 점 등에서 엿볼 수 있다. 가와바타는 차례차례 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평론활동을 왕성히 하기도 했으며, 몇 명인가 신인을 키우기도 했다. 일본펜클럽의 회장으로서, 그리고 국제펜클럽의 부회장으로서 동서문화의 교류에 공헌했다. 또한 일본근대문학관의 설립에 온 힘을 기울이는 등, 다방면에 있어서 큰 한 획을 그었으나, 마지막은 맨션 집필실에서 가스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은 노벨상으로 소개되기 보다는 그 자체의 서정적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것이 책에 대한 예의일지도 모른다. 이미 여러 번 번역되어 많은 사람들이 읽은 책이지만,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백미랄 수 있는 서정성은 발군이다. 즉 ‘눈 지방의 정경을 묘사하는 서정성과 감각적인 문체’는 여러 번 읽어도 여전히 감동을 준다. 이 작품의 특징은 인물과 배경 묘사가 치밀한 데 반해, 그 안의 두드러진 줄거리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 행위의 유한함을 자연의 무한함에 비교하려고 했던 저자의 의도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설국》은 비현실의 세계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순일(純一)한 미(美)의 구축에 성공했으며, 가와바타 문학의 최고봉으로 지목되는 작품이다.《설국》은《센바즈루[千羽鶴]》(1951) 《고도(古都)》(1962) 등 전후의 작품과 함께 1968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격변하는 쇼와[昭和] 시대에서 갖가지 전위문학적 실험을 거듭한다. 결국 그는 전통적인 일본의 아름다움 속에서 자기의 감성(感性)을 닦아 독자적인 문학의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근대 일본문학사상 부동의 지위를 구축했다. 그는 1934년 최승희의 일본 데뷔 무용발표회를 보고 당대의 일본 신진 여류무용가로서 그녀를 제1인자로 꼽았으며, 전후 발표한 장편《무희(舞姬)》에서 그녀의 예술을 다루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주로 현실을 주관적으로 재창조하여 새로이 결정(結晶)시킨 시적인 문체의 작품을 많이 썼다. 신심리주의 소설 <수정환상(水晶幻想, 1931)> 이후 잠시 허무적 경향을 보였으나 <설국(雪國, 1935~47)>에 이르러서는 인생을 허무한 대로 치열하게 살아가는 생명을, 슬픔으로부터 지켜내려는 작풍을 낳고 일본 근대 서정문학의 대표작가가 되었다. “접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니 눈의 나라였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설국(雪國)>은 시마무라라는 남자가 쿠마코라는 기생에게 끌려 니가타(新潟)의 온천장을 세 번이나 찾아간다는 내용이다. 중. 일전쟁 이후의 대표작인 <센바즈루(千羽鶴, 1949~51)> <명인(名人,1951~52)> <산의 소리(l949~54)> 등은 일본 고전의 전통을 살리면서, 늙어가는 작가 자신의 꿈과 각오를 쏟아 넣은 명작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유럽의 허무주의, 미래파,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은 일본 문학 유파인 신감각파를 대표하는 작가이다. 난해한 문체 속에 내밀하게 숨겨진 탐미와 죽음, 그 미학적 경지의 불가해성으로 일본 평론가들 사이에서조차 그의 언어체계가 보여주는 의미망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저서
이즈의 무희
서정가
금수禽獸
천우학千羽鶴
산소리山の音
잠자는 미녀
아름다움과 슬픔
고도古都
어머니의 첫사랑
여자라는 것
수상
1968 노벨 문학상
1948년 간행되었으며 일본의 근대 서정문학의 정점을 이루는 대표작이다. 노벨상을 수상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외국어로 널리 번역되었다. 에치고유자와[越後湯澤]온천장을 배경으로 도쿄[東京] 사람 시마무라[島村]를 둘러싸고 게이샤[藝者]인 고마코[駒子]와 미소녀 요코[葉子]의 미묘한 심리가 복잡하게 전개된다. 산문시와 같은 세련된 문체는 작가가 재발견한 신감각파적 수법의 극치를 이룬다. <설국>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13년에 걸쳐 쓴 중편 소설이다. 이 작품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작품 전체의 주제, 줄거리, 심지어 작중 인물들의 성격마저도 뚜렷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환상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정경이 배경을 이룬다. 그 정경 속에서 지순(至純)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여인의 모습을 감각적으로 섬세하게 그려 내고 있다.
이 소설은 세 명의 남녀 주인공의 이야기를 담담하고도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화자이며 이야기의 주인공격인 시마무라는 서양무용에 대해서 취미를 가진, 유산만으로 무위도식하는 처자식을 가진 한량이다. 그는 관능적이고 매혹적인 게이샤인 고마코에게 끌려 또 다시 그 눈고장을 찾는다. 그는 두 번째로 찾아가는 길에 아름답고 정결한 소녀 요코를 만난다. 시마무라는 고마코에게 끌려 몇 번이고 같은 온천장을 찾아간다. 그렇지만 고마코의 뜨겁고 애처로운 정을 인정은 하면서도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냉정하게 관망할 뿐이다. 이 소설은 구체적인 사건이나 줄거리가 없이 온통 하얀 눈에 덮인 온천장을 무대로 그 일대의 자연과 인정과 풍속 등의 지방풍물을 아름답게 그린다.
<설국>의 작품세계의 특징을 몇 가지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소설의 배경은 설국, 즉 눈이 많이 내리는 고장이다. 구체적으로는 에치고의 유자와 온천이 이 작품의 무대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어느 특정 지역의 온천장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흰 눈에 온통 덮여 있는 온천장과 그 일대에 펼쳐진 자연의 인정과 풍속 등의 지방풍물을 아름답게 그린다. 이러한 배경은 동양적이면서 일본적인 향취를 느낄 수 있게 한다.
둘째 주인공은 부모의 유산으로 무위도식하는 시마무라와, 게이샤인 고마코, 아름다운 소녀인 요코이다. 시마무라는 고마코에게 끌려 설국의 온천장을 몇 번이고 방문하지만 냉정하고 지적인 눈으로 관망한다. 심정과 태도만 있고 행동이 없는 허상에 불과하다. 즉 시마무라는 설국의 고마코나 요코를 있는 그대로 비쳐주는 일종의 공허한 거울에 지나지 않는다. 그와 같은 공허한 거울 속에 비쳐지는 고마코와 요코의 순수함이 감각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므로 작가가 그려내고자 하는 인물은 시마무라가 아니라 그를 통해 부각되는 인물인 고마코와 요코, 특히 고마코에 초점이 맞춰진다. 그러나 이들 인물 사이에는 현실적인 어떤 관계도 구체화되어 있지 않다. 이는 작품의 의도가 사건이나 관계에 있지 않고 설국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인물들의 미묘하고 섬세한 심리의 변화와 추이를 즉물적이고 감각적으로 표현하려 한 데서 나오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셋째 구성에 대해서이다. 이 소설에는 인물과 배경은 있지만 이렇다 할 사건이 없다. 따라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고 끝나버린다. 사건이 없으니 줄거리가 없고 소설로서 일정한 진행형식이 없다. 따라서 이 소설을 두고 플롯의 부재라고 한다. 그저 설국의 풍물과 심리의 변화만으로 작가가 그리고자 한 심리의 세계, 또는 어떤 상징의 세계를 암시환기만 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리고 추상적, 상징적으로 점묘만 해 나간 것이 또한 특색이다. 이런 점에서도 이 작품은 사건 소설이 아니라 심리 소설이요, 분위기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넷째 수법과 주제이다. 가와바타는 1924년 요코미츠 리이치와 함께 <문예시대>를 창간하여 신감각파의 쌍벽이 되었다. 그 신감각파는 종래의 자연주의 문학에 반기를 들고 서구의 전위적인 근대 예술을 실천한 문학유파였다. 그들의 공통된 수법상의 특징은 대상을 즉물적, 감각적, 기계적으로 붙잡아 예리하게 표현하는 데 있다. 따라서 대상을 바라보는 눈이 지적이요, 소재를 처리하는 태도가 비정적인 것이다. 이 같은 입장에서 가와바타는 인생의 단면을 감각적으로 파악하여 표현해 나간다. 그 같은 태도의 이면에는 동양적인 허무사상, 그 중에서도 불교적인 무(無)나 공(空)의 사상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 따라서 이 소설에 등장하는 배경이나 소재들은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표현을 통하여 느껴지는 현실 이상의 저쪽의 세계, 곧 인생에 있어서의 어떤 비정의 미나 애수의 미를 형상화하는 데 의미가 있다. 결국 이 소설은 사실의 세계를 그린 작품이 아니라 작가가 창조해 낸 상징의 세계를 그린 것이다. 그 상징의 세계는 ‘저녁풍경이 비치는 거울’처럼 ‘아름다운 도로(徒勞)1)의 세계’요, ‘투명한 덧없음’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세계는 일본적 애수의 미를 아름답게 형상화한 것이다. 요컨대 이 소설은 티 없이 맑고 깨끗한 설국의 세계를 감각적인 수법으로 그린 상징적인 심리 소설이요, 가와바타 문학의 최고 명작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의 전체적인 느낌과 분위기는 싸늘하고도 청결하다. 그것은 서두에서 그려지는 눈 덮인 산야의 첫인상이 지속적으로 작용함을 의미한다. 결말 부분에서 황홀하게 타오르는 불기둥과 스러지는 여인의 사랑은 쓸쓸하고도 허망한 여운을 남긴다. 이 소설에서는 분위기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이 작품의 주제인 사랑의 의미를 아름답게 채색하기 위한 한 방식으로 원용된다. 제목에서부터 환상적이고 청순한 분위기가 연상되기 때문에 이 소설 속에 그려진 사랑의 모습도 아름다움을 띠고 전달되게 된다. 따라서 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는 여러 배경과 장치들이 어떤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소설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는가를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요소들이 자체적으로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보는 것은 곤란하다. 그 모든 것들은 하나의 구조 속에 편입될 때 의미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뛰어난 형상화를 이룬 작품으로 평가받는 이유도 그 구조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설국』은 꽤 짧은 소설이다. 배경은 겨울이면 눈이 아주 많이 내리는 일본 북쪽의 한 마을이다. 그 마을에 한 도쿄 출신 청년인 시마무라가 와서 겪은 일들이 이 소설 속에는 서술되어 있다.『설국』을 읽다보면 시마무라가 쓴 일기를 읽는 듯한 느낌이다. 여행을 많이 다니는 사람들은 여행지에서의 특별한 기억들을 글로 남기지 않던가. 특히 그러한 글들은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차 있는 법이다. 바로 그러한, 일종의 기행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그런 소설이 바로『설국』이다.이 소설 안에도 시마무라가 자신이 여행을 간 마을에서 만난 두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쓰여져 있다. 그리고 그들을 보면서 시마무라가 알게 모르게 느끼게 되는 그 무엇인가도 드러난다.
처음에 시마무라는 도쿄에서 자신이 받은 스트레스를 풀고, 즐기기 위해 이곳으로 여행을 온다. 요코와 고마코가 있었던 마을은 관광지로 꽤나 유명한 마을이었던 모양이다. 처음에 그는 그저 게이샤들과 함께 술 마시면서 한량 같이 즐기다가 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고마코와의 만남을 통해서 그 마을에서 일어나는, 특히 고마코 개인에게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듣고 일종의 연민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고마코와 ‘친구’의 연을 맺고 그 뒤에도 시간이 나면 그 마을을 방문한다.
시마무라의 직업은 무용 평론가이다.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말이다. 하지만 그는 부모님이 물려주신 재산이 워낙 많아 사실 따로 밥벌이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놀고 먹으면서 지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다. 무용 평론가라는 나름의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그는 그 직업에 충실하지도 않았고, 무위도식하면서 지내다가 가끔 서양에서 나온 책 몇 개를 짜깁기 해서 원고를 투고하는 게 그가 하는 일의 전부였다. 처음에는 동양의, 특히 일본의 무용을 연구하면서 꽤 열심히 일한다. 그렇지만 점차 흥미를 잃고 서양의 무용을 연구하는 쪽으로 방향을 튼 뒤에, 그렇게 대충 대충 살아간다. 일본 내에서는 서양 무용에 대한 연구가 많이 되어있지 않았기에, 그가 그렇게 대충 하더라도 그가 일하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던 탓에 그런 생활이 가능하다.
그런 그에게 그 눈이 내리는 마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일종의 충격이었다. 고마코로 대표되는 그들은 시마무라와는 상황이 너무나 달랐다. 그들은 가난했고 그들이 살던 곳은 시마무라가 태어나서 살던 곳과 같은 대도시가 아니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외지인들을 대접하는 일을 하는 수밖에 없었고, 그렇기에 그들은 기예를 익히면서 자랐다(특히 여자들의 경우에는 말이다.). 확실히 시마무라에 비해서 환경은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시마무라보다 더 힘있게 살아가고 있었다. 시마무라는 자신의 일에 권태를 느끼고 무위도식 하면서 힘이 빠진 채로 살아가지만, 그들은 하루 하루를 힘 있게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시마무라는 그런 그들을 처음에는 연민으로 그들을 대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면서 자기 자신도 치유되어 나가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설국>은 하나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사진 같다는 느낌이 드는 작품이다. 눈으로 가득한, 그리고 별이 가득한 하늘을 이고 있는 어느 마을을 찍은 그런 사진. 그리고 이 150쪽의 ‘이야기’는 그 사진에 대한 설명인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그 설명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고, 사진 속에서 대화를 나누는 듯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눈에 들어온다. 아마 시마무라와 고마코일 것이다. 그런데 그 장면에서 약간의 어색함이 느껴지는 것을 발견했다. 시마무라는 그 고장의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고장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 바탕을 가지지 못한 것이다. 그에게서는 도쿄가 느껴졌다. 도쿄인인 그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까지 받기만 하지 베풀지 못한다. 그는 그들에게 배우고 치유를 받았지만 그 반대급부에 해당하는 것을 하지는 못했다. 마치 눈은 먼지를 자기 몸에 붙이면서 상대를 깨끗하게 해 주지만, 그 깨끗하게 된 대상은 그 눈을 위해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시마무라가 여행을 간 마을 사람들은 순수했다. 그들은 현실적으로 힘든 삶을 살고 있었지만 눈과 같은 마음씨를 가지고 있었다. 현실적인 고난에서 오는 아픔에 좌절도 하고 큰 상처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은 내면에 눈(snow)과 같이 순수하고 깨끗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눈은 그 안에 먼지를 가지고 있지만, 그 먼지를 중심으로 깨끗한 물을 모아 순수한 아름다움을 획득한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더럽혀진 다른 대상들을 깨끗하게 씻어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자기 자신의 깨끗함을 버리면서 말이다. 그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밤이 되면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는 것을 보고 자라서 그런 순수한 마음을 가졌던 것일까.
하지만 시마무라는 어떠했던가? 그는 도시 속에서 속물과도 같이 살던 사람이었다. 도시의 회탁한 공기와도 같이 그는 오염되어 있었다. 그가 사물을 바라보는 것은 그 대상을 가지고 자신에게 이득이 되거나, 혹은 자신에게 즐거움이 되는 행동을 하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그는 요코를 처음 보았을 때 한 명의 매력적인 여성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고마코의 경우도 한 명의 게이샤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하는 일이라는 것은 남들에게 참된 지식을 전달해 주기 위한 순수성의 발로라기보다는 자신의 체면치레를 위한 다분히 오염된 마음의 발로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런 그가 우연치 않게 자신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순수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 여행을 가게 된다. 그곳에서 고마코를 만나고 인연이 이어져 그 마을을 방문하는 동안 오염을 씻어낼 수 있었다. 그 마을의 순수한 사람들은 더럽혀진 것을 보면 그것에 붙어 그 더러움을 씻어내는 본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에서 인이 박힌 그 더러움은 완전히 씻어지지 못했다. 그가 마을에 있는 동안 그가 고마코나 요코나 그 외 다른 마을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것이 있는가? 그는 그저 받기만 했고 그의 더러움이 씻겨 나가는 것을 신기하게 관찰만 했을 뿐이다. 소설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주저하며, 요코를 구하려 뛰어드는 마을 청년들에게 옆으로 밀려난다.
눈은 어떠한 점에서 보면 진주와도 닮은 점이 있다. 진주조개는 자신에게 이물질이 들어왔을 때, 그 상처를 감싸는 과정 속에서 아름다운 진주를 만들어낸다. 눈은 그 가운데에 먼지가 없으면 만들어질 수 없다. 눈도 일종의 상처라 불릴만한 것을 물로 감싸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다. 고마코가 살던 마을–지금부턴 그 마을을 ‘설국’이라 부르겠다–사람들도 이러한 눈과 같은 사람들이었다. 어쩌면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시마무라로 대표되는 우리 모두가 잊고 사는 그 순수함을 ‘설국’ 사람들을 통해 우리에게 다시 깨닫게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시마무라가 완전히 치유되지 못하는 모습에서, 우리 도시인들이 지금 어떤 위치까지 가 있는지 우회적으로 꼬집는 것은 아닐까 싶다. 결국 그는 순수성을 잃고 점점 더 속물적으로 변해가는 사람들과 이 세상을 향해 다시 ‘순수’라는 가치를 일깨워 주려고 이 소설,『설국』을 쓴 것으로 보인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문학의 특징으로 우선 서정과 극의 융합을 들 수 있다. 일본 문학의 전통적인 서정과 현대 소설의 극적 논리가 그의 작품 속에서 독특하게 융합된다. 작중 인물들이 뚜렷한 행동을 하지 않으면서도 이미지가 분명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또 하나는 형식의 문제이다. 소설이라고 하면 정돈된 형식을 갖추는 것이 보통인데, 그의 작품은 오히려 형식에 대한 무관심을 특징으로 한다. 절정과 결말을 향해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진행 과정이 보이지 않고, 다만 하나의 사건이 연상 작용에 의해 또 다른 사건을 유도할 따름이다. 다시 말하면 한편의 완결된 소설이라기보다는, 우연히 펼쳐진 어느 부분을 보는 것 같다. 그가 노벨상을 수상했을 때, “작품 속에서 죽음을 미화하고 인간과 자연과 허무 사이의 조화를 추구하고자 했으며 평생 동안 아름다움을 얻기 위해 애썼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그의 문학적 경향을 응축한 것이다.
겨울이면 눈에 파묻혀 버리는 조용한 온천마을을 ‘시마무라’는 3년간 연이어 찾아온다. 자신을 기다리는 어린 게이샤 ‘고마코’를 만나기 위해서이다. 결혼한 ‘시마무라’이지만 낯선 타지에서 만난 ‘고마코’란 게이샤는 분명 매력적이다. 이따금씩 그녀가 그리워질 때 또 여행을 하다가 사람이 그리워질 때 시마무라는 온천장의 ‘고마코’를 찾아온다. 그들의 만남은 이렇게 일시적이고 기약이 없다. ‘시마무라’는 자신의 처지 때문인지 ‘고마코’와의 관계에 확실한 선을 그어두지만, ‘고마코’는 그렇지 않다. 계속해서 구애를 하고 때때로는 상처받고 토라져 그만둘 성도 싶지만 포기하는 법이 없다. 그녀의 사랑은 때묻지 않아 순수하며 이는 고향도 아닌 온천장에서 몇 년 동안이나 그를 기다릴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시마무라’는 서양 무용에 대해 글을 쓰는 작가이다. 떠돌아다니는 그에게는 잘 맞는 직업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는 자신의 일에 냉소적이다. 서양 무용에 대한 글을 쓰지만 정작 자신은 서양 무용을 한번도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봐도 무의미한 일을 그 또한 무의미하게 생각하며 세상을 ‘냉소적인 프레임’으로 바라본다. 그렇기에 안 될 걸 알면서도 자신에게 애정을 표하는 ‘고마코’의 노력을 헛수고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3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냉소적이던 ‘시마무라’도 어느샌가 자신이 ‘고마코’의 매력에 빠지고 있음을 인지한다. 자신이 정해 놓은 선을 넘을 수 없다고 판단해서인지 그는 앞으로 ‘고마코’를 찾아오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 ‘고마코’와의 사랑의 결과가 아무 것도 남지 않을 ‘무의미’임을 알기에 냉소적인 그의 프레임이 스스로를 조절한 것은 아닌가 판단된다.
자신과 인연이 될 뻔했던 스승의 아들 유키오의 간병을 위해 일하는 고마코, 게다가 유키오는 요코라는 다른 애인이 있음에도 그녀는 그를 위해 일한다. 그녀는 요코를 질투하기는커녕 연민의 정 같은 것을 느낀다. 그녀가 유키오를 위해 일하는 것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책임이나 의무처럼 생각한다. 고마코는 그렇게 삶을 무던하게 견디며 살아가는 여인이다. 그녀는 자신의 상황에 순응하며 최선을 다해서 그 ‘주어진 삶’을 살아간다. 그런 ‘주어진 삶’은 우리 세대보다는 우리의 어머니 세대에 더 가까운 삶이다. ‘주어진 삶’속에서 희생을 통하여 살아온 그런 삶들은 너무나 숭고하여 아름답기까지 하지만 다시 되풀이 되서는 안 되는 그런 것이다.
반면 현대적 삶의 모습은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있다. 세계 속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욕구를 충족해나가는 자아의 실현 아니면 추구해야 될 무언가를 알지 못하거나 잃어버린 후의 허무(혹은 권태)가 현대적 삶의 모습들이다. 시마무라의 삶은 후자에 더 가깝다. 그래서 시마무라는 자신의 삶을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 둔다. 설국은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고마코를 바라보는 시마무라의 흘러가는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허무는 플라톤적인 사랑을 나누는 이 두 연인의 수동적 삶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물론 두 사람의 수동성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고마코가 적극적인 수동성이라면 무위도식에 가까운 삶을 사는 시마무라는 소극적인 수동성이다.)
여기서 허무는 두 가지 종류의 감정적 근원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나는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다’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나의 욕망은 결코 충족될 수 없다’이다. 그런데 보통사람이라면 본래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았을 리는 없다. 그런 인간이 있다면 사이코패스와 같은 정신병리학적인 연구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보통은 계속하여 욕망이 좌절된 후에야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게 되거나 더 이상 무었을 욕망해야 될지 모르는 상태가 된다. 때문에 허무의 근원을 알기위해서는 무엇이 그를 욕망으로부터 후퇴하도록 했는지를 봐야한다.
고마코의 허무가 명백한 삶의 사건들에 기반하고 있다면 시마무라의 허무는 그 근원이 모호하다. 다만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생각해보면 소설의 배경인 1930년대는 5.15 사건과 2.26 사건 등 일련의 군부 쿠데타를 통해서 일본은 극우파와 군부가 손을 잡고 자멸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 시기이다. 그런 시대에 생각 있는 지식인들은 목숨을 걸거나 침묵을 지켜야 했을 것이다. 그들은 무력감으로 인해 어디론가 도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할말을 하지 못할 때 말이 무기인 지식인들은 허무해진다. 결국에는 펜이 승리할지 몰라도 당장은 칼이 더 우세한 법이다. 그래서 시마무라는 한 번도 직접 본적이 없는 현대무용에 대한 글이나 쓰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설국이 처음 연재된 때가 1935년이고 47년에 가서 끝맺었으니 집필시기도 그 시대와 일치한다. 게다가 설국은 가와바타의 자전적인 소설이 아닌가? 작가의 심리상태가 시마무라에게 투영되어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물론 이렇게 당시 사회를 허무의 배경으로 제시하면 시마무라의 태도가 무력한 지식인이 취할 수 있는 적극적인 정치적 거부의 표시쯤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텍스트만 놓고 보았을 때 그런 ‘적극적’ 징후의 혐의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다시 텍스트 안으로 들어와야만 한다. 역시 고마코에 비하여 시마무라의 허무는 그 근원이 모호하다. 그것은 역사적 배경일 수도 있고 어떤 사건일 수도 있으며 다분히 관념적인 것일 수도 있다.
요즘 사람들로 치면 얌체처럼 밀당을 하는 것 같은 두 인물은 서로에게 직접적으로 애정을 표현하지 않는다. 그래도 고마코가 조금은 더 적극적인데 그녀의 애정을 시마무라는 알면서도 헛수고라고 생각하며 관심 없는 척 하지만 그 역시 고마코에게 점점 매료되어 간다. 그녀를 바라보는 시마무라의 시선은 관능적으로 변해간다. 시마무라가 고마코에게서 발견하는 관능은 단순히 시골의 게이샤에게서 발견되는 그런 관능이 아니라 그에게는 없는 생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와(그러나 그것은 ‘주어진 삶’이라는 관성계 안에서의 적극성이기에)그 속에 스며있는 슬픔과 허무의 정서가 만들어 내는 관능이다.
누군가에게서 삶에 깊숙이 뿌리박힌 관능을 발견한다는 것은 깊은 애정을 느낀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시마무라는 그런 위협(?)을 느낄 때마다 떠나고(하지만 이미 늦었기에) 다시 돌아온다. 고마코는 반대로 시마무라의 삶에 속박되어 있지 않은 것 같은 자유스러움에 반했을 것이다. 그리고 시마무라는 보통의 관광객들과는 다르게 어딘가 우울하고 허무한 분위기를 풍기는 인물이다. 그것은 그 둘의 공통점이다. 우리가 이성에게서 자신에게 없는 장점을 발견하는 동시에 자신과 닮은 점을 발견해가며 끌리게 된다. 그런 것처럼 그들은 그렇게 서로에게 애틋한 감정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관광객을 연모하는 게이샤라니, 게이샤에게 반한 관광객이라니, 정말 이 모든 게 헛수고처럼 느껴진다.
외딴 고장에 속박된 청춘과 이윽고 그곳을 박차고 떠나는 그들의 모습을 그린 소설이 일종의 성장소설이라면 세상에 지쳐 어딘가로 돌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그린 소설은 귀향소설이다. 설국은 고마코의 관점에서는 성장할 수 없는 성장소설이며 시마무라의 관점에서는 귀향할 수 없는 귀향소설이다. 어쩌면 시마무라는 고마코가 있는 설국으로 영원히 귀향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고 고마코는 설국을 떠나 시마무라와 함께하는 삶을 그려 보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 넘어야 할 삶의 위반 요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었을까? 그저 그는 설국에의 귀향을 의미 없이 반복하고 그녀는 왔다가 언젠가는 떠나갈 이를 기다릴 뿐이다. 설국은 그들이 마주치는 어긋난 정거장이다. 각자의 길을 포기할 수 없기에 그들은 그 짧은 마주침만을 이어간다. 아무런 미래에 대한 기약도 없는 만남을 계속하는 그들의 모습은 전혀 생산적이지 않아 보이지만 좌절된 욕망이란 그런 비생산적인 행위의 반복을 통해서 어느 정도 해소되는 면도 있는 법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만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 행위는 끊임없이 반복되면서도 어떤 욕망의 충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욕망의 충족을 끊임없이 유예한다.
그들이 욕망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은 생활의 이치를 거스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연의 이치와 다를 게 없다. 사회적인 한계란 결국 자연적인 법칙과 같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개인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거대한 것이고 생활의 근원은 결국 자연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국은 하나의 지리적 장소인 동시에 사회성이 탈색된 자연의 이미지를 가지고 인물들의 한계를 규정하는 법칙들의 상징이다. 눈이 하얗게 세상을 덮어버렸을 때의 심리적 효과를 생각해보라? 자연은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아름답게 압박해 온다. 그것은 허무주의를 일종의 미의식으로 승화시킨다. 관찰에 의한 묘사를 통해서 주로 표현되는 인물들의 감정은 배경 속에 그들을 단단히 묶어둔다. 설국은 3인칭 소설임에도 심리 묘사를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작가의 서술은 마치 시마무라나 요코의 몸속에 들어가 그들의 관점에서 상대를 관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독자는 주관적 감각을 통해 파악된 세계를 거친 후 인물들을 만난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의 제목은 ‘설국의 게이샤’도 아니고 ‘설국의 사람들’도 아닌 그냥 ‘설국’일 수밖에 없다.
소설 속에서 서정적으로 묘사되는 자연은 거대하고 변함이 없지만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사라져가야 할 유한한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 사람이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며 살아갈 수는 없다면 그것에 순응하며 좌절된 욕망에 대한 비생산적인 행위를 반복하는 삶의 태도는 바람직해 보이기까지 한다. 비록 그것이 헛수고라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반복되는 삶도 가끔 의미 있는 사건을 통해서 삶은 다른 차원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소설의 마지막에 일어나는 화재는 바로 그런 사건이다. 분명한 것은 이 화재야 말로 이 소설에서 일어나는 가장 의미 있는 사건이며 그것을 통해서 인물들의 삶에는 변화가 찾아올 것이란 점이다. 요코의 죽음은 고마코의 삶의 짐을 덜어줄지도 모르고 마침내 그녀는 그곳을 떠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마무라는 그런 고마코를 위해서 이제 정말 자신이 설국을 방문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할 때라고 느낄지도 모른다.
소설은 시마무라의 눈에 들어온 은하수의 이미지를 남기고 끝난다. 설국에서 먼 우주의 은하수로 이어지는 이 거대한 신비로움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때론 운명으로, 때론 기적으로 이끌기도 하겠지만 보통은 누군가 밟고 지나간 눈길처럼 그저 따라가야만 할 삶의 길을 얘기하고 있는 것 같다. 그 길 위에서 우린 그저 언 발가락을 꼼지락 거려 볼 뿐 다른 길을 찾아가는 건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헛수고란 멀쩡한 길을 두고 다른 길을 가는 거니까.
“한심해요.”
그리고 고마코는 재빨리 따지고 들었다.
“당신은 좋은 여자라고 하셨죠? 떠날 사람이 왜 그런 말을 하신 거예요?”
고마코가 머리꽂이를 툭툭 다다미에 내리꽂던 모습을 시마무라는 떠올렸다.
“울었어요. 집에 돌아가서도 울었어요. 헤어지는 게 무서워요. 하지만 어서 가버려요. 그 말 듣고 울었던 걸 잊진 않을 테니까.”
고마코의 오해로 도리어 여자의 몸 깊숙이까지 파고든 말을 생각하자, 시마무라는 어쩔 수 없는 미련이 사무쳤는데, 불난 곳에서 갑자기 사람들 소리가 들려왔다. 새로 타오르는 불길이 불똥을 튀기고 있었다.
“어머, 다시 저렇게 불길이 치솟아요.”
두 사람은 그제야 구원받은 듯, 내달리기 시작했다.
고마코는 잘 달렸다. 꽁꽁 언 눈을 게다로 재빠르게 스치며, 팔도 앞뒤로 흔들기보다는 양쪽 겨드랑이에 붙인 모습이었다. 가슴 언저리에 세게 힘준 자세가 의외로 몸집이 작다고 시마무라는 생각했다. 다소 살찐 시마무라는 고마코의 모습을 보며 달리느라 금방 숨이 가빠졌다. 그러나 고마코도 갑자기 숨이 차, 시마무라에게 허청거리며 기댔다.
“눈이 시려서 눈물이 나요”
뺨이 달아오르는데 눈만은 차갑다. 시마무라는 눈꺼풀이 젖었다. 깜박거리자 은하수가 눈에 가득 찼다. 시마무라는 흘러내릴 듯한 눈물을 참으며,
“매일 밤 이런 은하수인가?”
“은하수? 예뻐요. 매일 밤은 아니겠죠. 아주 맑네요.”
은하수는 두 사람이 달려온 뒤에서 앞으로 흘러내려 고마코의 얼굴이 은하수에 비추어지는 듯했다.
겨울만 되면 밤의 밑바닥이 하얘질 정도로 눈이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고장. 세 번의 여행길에서 만난 <설국>에 담긴 자연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다양한 표현들은 이유 모를 감상에 젖게 만든다. 따스해진 가슴에 예고 없이 찾아드는 장면들에서 빠지지 않고 계속 등장하는 것은 두 사람이 대화하는 장면들이다. 시마무라와 고마코의 대화는 그들이 애정의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유추할 수 있게 하지만 그 대화의 줄은 촘촘히 얽혀 있어서 줄의 어느 부분을 잡아야 할지 몰라 힘을 쏟아볼 요량도 없이 맥이 빠진다.
(12p) 거울 속에는 저녁 풍경이 흘렀다. 비쳐지는 것과 비추어지는 거울이 마치 영화의 이중노출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등장인물과 배경은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게다가 인물은 투명한 허무로, 풍경은 땅거미의 어슴푸레한 흐름으로, 이 두 가지가 서로 어우러지면서 이세상이 아닌 상징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었다.
눈에 등불이 켜졌다고 묘사하는 요코라는 여인을 여러 장소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시마무라가 내적으로 풍겨내는 심리표현들은 관음적인 묘한 쾌감을 불러일으킨다.
(25p) 무용가의 살아 움직이는 육체가 춤추는 예술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제멋대로의 상상으로 서양의 언어나 사진에서 떠오르는 그 자신의 공상이 춤추는 환영을 감상하는 것이다. 겪어보지 못한 사랑에 동경심을 품는 것과 흡사하다.
부모가 남겨주신 재산으로 무위도식하며 책이나 사진과 같은 인쇄물만을 보고서 서양무용에 관해서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시마무라의 골수 깊숙이 박혀 있는, 대상을 탐색하고 이리저리 재며 상상하는 관찰자적인 버릇은 여행 중인 설국에서 일어나는 상황 속으로 몰입할 수 없도록 한다.
<설국>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단어인 ‘헛수고’라는 단어는 그 관찰자 적인 버릇의 결과이며 모든 관계의 진전을 방해한다. 이 헛수고는 시마무라의 입을 통해 여러 장면에서 등장한다. 그리고 그것은 말 그대로 모든 행위가 헛수고임을 의미한다. 약혼자를 위해 게이샤가 된 것도 헛수고이고 읽은 책의 제목과 지은이 그리고 등장인물을 나열하는 것도 헛수고다. 이 헛수고는 시마무라가 중요한 것을 취하려는 순간 자의적으로 허무함이라는 니힐리즘을 버무려 탈출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때 마침 묘사되는 주위 풍경의 평화로움은 시마무라의 탈출행위를 교묘히 덮어버린다. 그리고 예고 없이 또 다른 시점에서 새로운 대화들이 이어지고, 고양되고, 또 탈출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그렇지만 그의 탈출은 점차 어려워진다.
(p110) 고마코의 애정은 그를 향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아름다운 헛수고인 양 생각하는 그 자신이 지닌 허무가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고마코의 살아가려는 생명력이 벌거벗은 맨살로 직접 와 닿았다.
그런데 속물임에 분명한 시마무라가 허무함을 무기로 그녀들에게서 거리를 두려는 이유에 대해 궁금증이 생긴다. ‘헛수고’와 그것 때문에 느낄 수 있었던 순수함(생명력)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시마무라의 더러운 부분이 그녀들에게 미치지 않도록 만든 것일까?
“나는 더러운 병균을 가지고 있는 놈이니 순수한 이들에게 병균을 전염시키지 않고, 그냥 앓으면서 혼자 더러움을 감내하고 간직하며 살겠다.” 이런 것일까?
마지막의 화재사건은 그들의 줄다리기가 종결됨을 의미하는데 과연 시마무라는 그녀들과의 추억들을 헛수고로 생각했던 것이 다행스러울까? 아니면 후회스러울까? 궁금하게 만든다. 아마도 후자 쪽에 가까워졌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작품 <설국>은 장편소설로서 1935년부터 1937년까지 잡지 등에 발표되어 간행되었다. 작가는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속편을 집필하고 가필 수정 등 거의 14년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완성된 작품이며 노벨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주인공 시마무라는 서적이나 사진을 통해 서양 무용에 관심을 나타내는 평론가이지만 무위도식하는 인간이다. 그는 여행을 하면서 자연을 접하는 일로 자신을 되찾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여행도중 온천에서 게이샤 고마꼬를 만나 사랑하게 된다. 줄거리다운 줄거리는 없고 인간의 순수한 사랑과 고독이 아름다운 눈고장을 배경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한 편의 그림 같은 이상형의 세계이다. 영화로도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대표작 <설국>의 성립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즉 분게슌주 1935년 1월호에 기필하여 쇼세쯔신쵸 1947년 10월호에서 각필하기까지의 약 12년과 9개월이라고 하는 세월을 요했다. 설국은 여러 잡지에 단속적으로 그것도 자의적으로 발표되었는데 여기에는 정본에는 없는 표제가 붙어 있다. 표제가운데 <설국초>라고 하는 작품이 있는데 이는 <설중화재>와 <은하수>으 두 편을 합쳐서 개고한데다가 더 써 보태어 한편으로 한 것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저녁 경치의 거울>에서 공놀이 노래>까지의 7편을 정리하여 <설국>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1937년 6월에 소겐샤에서 간행했다. 그 가운데에는 그때 새로 써 넣은 부분이 있다. 이를 가리켜 새로 쓴 원고라고도 하고 구판 설국이라고도 한다. <설국>의 종장인 <속설국>이 발표된 것은 1947년 10월이다. 그 다음해인 1948년 12월 이미 간행된 부분에 상당한 손질을 해 <후기>까지 써 보태어 소켄샤로부터 결정판으로서의 <설국>을 간행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가필과 정정은 계속되었다. 즉 신초샤로부터 1949년 6월에 16권본의 가와바타야스나리전집 제 6권에 수록될 때에도, 1960년 6월에 12권본의 가와바타야스나리전집 네 5권에 수록될 때에도, 그리고 보쿠요샤로부터 1971년 8월에 정본 설국이 간행될 때에도 대폭적인 가필정정을 했다.
이처럼 설국은 여러 잡지에 단속적으로 발표된 이래 집요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개고를 거듭했던 것이다. 이로부터는 작자 가와바타가 얼마나 이 작품에 애착하고 있었나 하는 것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설국>은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가자 설국이었다. 라고 하는 유명한 한 구절로 시작되는데 에치고유자와가 이 설국이라고 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서는 작자 가와바타도 독영자명에 장소는 에치고의 유자와 온천이다라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설국에 대하여>에서 <설국의 고마코에게는 모델이 있습니다>라고 말한 대로 고마코에게는 모델이 있다는 것도 알려져 있다. 시마무라에 대해서는 작자 자신이라고 하는, 다시 말해서 작자 자신이 시마무라의 모델이라고 하는 견해도 있는데 이는 가와바타가 <설국>에 대하여에서 시마무라는 내가 아닙니다 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으므로 시마무라의 모델은 없다고 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작품의 무대를 어느 지방을 모델로 해서 썼다던가, 주인공에게 모델이 있다던가 없다던가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것과 작품세계를 분리하여 작품을 완전히 독립된 세계로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설국>은 본문이동이 심하다고 하는 것은 전술한 대로이다. 초출잡지와 정본의 이동을 살피는 가운데 작자의 창작의도를 파악함으로써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다 하더라도, 역시 원칙적으로는 초출의 작품세계와 정본의 작품세계는 서로 다른 세계로서 봐야 하는 것이다.
가와바타는 <설국>의 처음 부분을 쓰기 위해 설국의 온천 여관에 갔었는데, 쓴 장소도 작품세계와 관련시킬 필요가 없다. 가와바타가 설국의 온천 여관에 묵으며 그 지방에서 취재한 것도 적지 않을 것이므로 전혀 관계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다 할지라도 취재한 것에 의해 쓰인 장면 역시 사실을 사생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작자의 작의가 더해져 변형된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러니 독자나 연구자들이 작품의 모델에 해당하는 지방을 본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방해가 되는 일도 많으리라 생각된다.
이에 대해서는 데라다 도오루의 <어느 가와바타 씨의 작품도 우리들을 일본에 또는 일본의 온천에 데리고 가지 않고, 가와바타에게로, 가와바타의 일종의 이상한 생리의 움직임에게 데리고 간다>고 한 말에 귀를 기울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설국>에는 유자와 온천이라고 하는 지명이 나오지 않는데, 이에 대해서 가와바타도 <설국에 대하여>에서 <나는 일부러 지명을 감추어 두었습니다. 그 이유의 하나는 지명을 밝힘으로써 독자의 자유로운 상상을 빼앗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하나는 모델 여자에게 폐를 끼칠 것을 두려워해서였습니다>라고 말했으니 재론의 여지도 없을 것이다.
모델 여자란 고마코의 모델을 말하는데, 이 문장에 이어 모델을 현실적으로 사생한 것이 아닙니다라 했다. 또 <설국의 극화>에서도 모델이 있다고 하는 의미에서는 고마코는 실재하지만, 소설의 고마코와 현저히 다르므로 실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바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모델과 작중의 고마코를 관련시켜 생각하는 것은 피해야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와바타의 <설국의 여행>이라고 하는 글 가운데에는 가와바타가 <설국>을 쓰기위해 체류했던 유자와의 온천 여관에서 메모식의 일기를 썼는데, 설국에는 이 일기의 부분과 일치하는데도 몇 군데인가 보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설국>의 세계를 감상하는데 있어 이것이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설국>의 세계는 데라다 도오루의 말처럼 가와바타의 일종의 이상한 생리의 움직임이 만들어낸, 현실과는 동떨어진 하나의 완전히 독립된 세계로 읽는 것이 바르게 있는 방법인 것이다.
국경의 긴 터널은 에치고 접경의 시미즈 터널을 모델로 한 것이다. 이 터널은 시미즈 터널이라 해도 좋고 다른 어떤 터널이라 해도 상관없다. 다만 터널의 이쪽은 현실의 세계, 저쪽, 다시 말해서 <설국>의 무대는 널리 알려져 있는 대로 비현실의 세계로서 이해하면 되는 것이다. 작자 가와바타의 일종의 이상한 생리의 움직임이 만들어낸 세계, 즉 작자의 작의에 의해 성립된 창작의 세계로서 이해하면 되는 것이다.
이 세계는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만들어낸 설국이 시점 인물 시마무라의 눈에 비친 세계이다. 그러므로 설국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마무라라고 하는 인물에 대해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를 흔히 허상이라고들 하는데, 그가 허상이든 실상이든 여기에서는 문제로 삼지 않아도 좋다. 다만 그의 참 모습을 이해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시마무라는 부모의 유산으로 무위도식하는 남자이다. 그는 도쿄의 서민촌에서 자랐기에 어린시절부터 가부키 시바이에 친숙했다. 학생시절에는 취향이 춤이나 쇼사고토로 치우쳐 낡은 기록을 뒤지기도 하고 원조를 찾아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가 일본무용의 한 이론가로서 독립하게 되었을 때 갑자기 서양무용으로 취미를 바꾸어 버렸다. 그의 서양무용에 대한 연구 모습을 인용해 보면 이러하다.
-서양무용에 대한 서적과 사진을 모으려고 포스터나 프로그램 따위까지 고생하여 외국으로부터 손에 넣었다. 이국과 이지에 대한 호기심뿐만은 결코 아니었다. 여기에서 새로 발견한 기쁨은 눈앞에서 서양인의 춤을 볼 수 없다고 하는 데에 있었다. (중략) 서양의 인쇄물에 의지하여 서양무용에 대해 쓰는 것만큼 안락한 일은 없었다. 보지 않은 무용 같은 거 이세상이 아닌 이야기다. 그만큼 탁상공론은 없고 천국의 시이다. 연구라고는 해도 제멋대로의 상상으로 무용가의 살아있는 육체가 춤추는 예술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서양의 말이나 사진으로부터 떠오르는 공상이 춤추는 환영을 감상하고 있는 것이다. –
시마무라에 있어서의 서양무용은 탁상공론에 의해 이루어진 천국의 시이며, 제멋대로의 상상과 공상이 춤추는 환영이다. 그는 이러한 서양무용을 감상하는 일에 의해 가끔 서양무용의 소개 등을 씀으로써 문필가 나부랭이 축에 끼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이 세상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천국의 시를 보는 이상한 감각의 시마무라는 설국에 있었을 때 비로소 현실을 자각하게 된다. 즉 그는 은으로 된 화조가 섬세하게 아로새겨져 있는 교코에서 만든 철병에서 부드러운 송풍소리를 듣는다. 그것도 소나무 소리는 둘로 겹쳐져 가까운 것과 먼 것으로 나뉘어 들린다. 그 먼 송풍의 좀 더 저쪽에 작은 방울이 은은하게 계속하여 울리고 그는 철병을 귀에 대고 그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그는 이 바다나 산이 우는 소리를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 그 원뢰소리가 귀밑을 통과하는 것같이 느끼기도 한다. 비현실의 세계인 설국의 세계를 보는 시점인물로서는 이러한 시마무라가 가장 적절하지 않을까 한다.
하여튼 설국의 독자의 뇌리에는 시마무라가 만나러 가는 여자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될 것이다. 손가락으로, 문득, 유리창에 선을 긋자 거기에 생긴 저녁 경치의 거울에 비친 땅거미의 물결 이랑에 떠오른 요염하고도 아름다운 요코의 모습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저녁경치의 거울은 비현실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설국>의 세계는 비현실의 세계로서 묘사된 세계라고 하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 비현실이라고 하는 것은 거울의 비현실의 힘으로서 그 장을 여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설국>의 세계 전체가 이 거울에 비친 세계라는 것은 아니다. 이 거울은 독자들의 뇌리에 작품세계가 비현실의 세계라고 하는 것을 선명하게 인상지워 주는 역할을 해주는 것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작품세계를 하나의 거울에 비추어서만 그리는 것은 재미가 없다. 그러므로 작품의 시점인물 시마무라를 설국으로 안내하는 역할이 지워진 요코를 비현실의 힘을 가지고 있는 거울에 비춤으로써, 그녀를 비현실의 세계의 사람으로 채색한 것이다.
한번 채색된 요코는 거울에 비취지 않아도 비현실의 세계의 사람이며, 비현실의 사람이 있는 세계는 비현실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저녁경치 거울의 비현실의 힘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요코가 모습을 보였을 때에도 이야기와도 같은 흥미가 앞섰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요코가 역장을 부르는 장면은 거울에 비친 장면이 아니지만, 저녁 경치 거울의 비현실의 힘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설국의 시점인물 시마무라는 이야기와도 같은 흥미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이야기는 현실의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비현실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시마무라는 비현실의 힘을 가진 거울을 통하여 요염하고도 아름다운 야광충과도 같은 눈의 요코를 보고 반한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갈 때 자신의 눈에는 모든 것이 비현실의 세계로 보이는 안경이 씌워진다. 그 안경을 쓴 자신도 비현실의 세계의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죄의식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손쉬움으로 간단히 세탁하기에는 고마코가 너무 청초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물론 여기에는 저녁 경치의 거울은 있었을 것이다. 라는 표현이 있고, 또 석양이 기차 유리창에 비치는 여자의 얼굴처럼 비현실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라고도 표현되어 있어, 시마무라가 세상을 볼 때 비현실적인 방법으로 본다고 하는 것을 뒷받침해 준다. 다시 말해서 시마무라의 눈에는 세상이 비현실의 세계로 보이는 안경이 씌워져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마무라는 무엇인가 비현실적인 것을 타서, 시간이나 거리에 대한 생각도 사라지고 허무하게 몸이 옮겨져 가는 것 같은 방심상태로 떨어진 것이다.
설국은 지금의 니가타켄인 에치고의 유자와 온천을 모델로 하여 쓰인 소설인데 이와 작품세계는 분리하여 직품을 읽어야 한다는 것은 전술한 대로이다.
<설국>에 이어 또 다른 대표작으로 꼽히는 『산소리』는 몽환 세계와 현실 세계의 귀로에 서서, 과거에 동경했던 연상의 여인에 대한 집요한 집착과 현실의 터부에 대한 과감한 도발이 차가울 정도로 차분히 전개되는 소설이다. 『산소리』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후기 대표작으로 꼽힌다. 해몽 소설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이 텍스트에서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유머로 그려지는데 그 유머에는 읽는 이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그런 차가움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장편 소설 『고도(古都)』라는 작품은 아이 때 버려졌던 치에코에 대한 이야기이다. 치에코는 양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자랐지만 가슴속에 알 수 없는 외로움을 품고 있다. 아름다운 처녀로 자란 치에코는 축제의 밤, 홀로 신사에 참배를 갔다가 자신과 똑 닮은 나에코를 만나게 된다. 어릴 적 헤어진 쌍둥이 언니를 만나게 해달라고 기원했던 나에코는 치에코를 반가워하지만 치에코의 가슴에는 격정적인 파란이 인다. 한날한시 한배에서 태어났지만 신분이 다른 치에코와 나에코. 두 사람의 운명의 엇갈림이 고도(古都) 교토를 배경으로 애잔하게 펼쳐진다.